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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대표 지장기도처인 원심원사에 다녀오다

산풀내음 2019. 5. 17. 23:12

고창 선운사 도솔암, 서산 개심사, 남해 용문사와 더불어 우리나라 대표적인 지장기도도량인 원심원사(元深源寺)에 다녀왔다. 2018년 9월에는 원래의 심원사를 이전하여 중창한 철원의 심원사를 다녀왔고, 이번에는 옛터에 다시 복원한 심원사에 다녀온 것이다. 석대암 지장보살 이야기 속의 지장보살상(생지장보살)은 철원의 심원사에 모셔져 있고, 원심원사의 석대암엔 대신 새롭게 조성된 지장보살상이 모셔져 있었다.

원심원사가 위치한 보개산(寶盖山)은 일반인에게 등산이 허용된 남한 최북단의 산으로 지장산(地藏山)으로도 많이 알려져 있다. 그리고 보개산의 최고봉인 지장봉(877m)은 환희봉이라고도 불렸다고 하는데, 이는 고려 충렬왕 때 민지(閔漬)가 쓴 「보개산 석대기(寶盖山石臺記)」에서 그가 보개산 심원사에 머물 때 환희봉에서 지장보살이 체현한 것을 보았다고 했고, 이 이야기가 널리 퍼지며 환희봉을 지장봉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환희봉이라는 이름은 민지가 지장보살이 모습을 드러낸 것을 목격하고 환희심이 일어나 불사를 일으킨 데서 비롯되었다고 하는데, 지장봉과 환희봉이라는 두 지명의 선후 관계는 다소 불분명한 면이 있다고 한다.

연천 보개산(지장산)에 위치한 원심원사는 신라 진덕여왕 1년(647년)에 영원조사(靈源祖師)가 창건하고 당시에는 흥림사(興林寺)라 하였다. 당시 영원조사는 영주산(靈珠山. 보개산의 옛 이름)에 4개의 사찰을 창건하였으나, 고려시대 때 영원사, 법화사, 도리사는 폐사되고 흥림사만 남게 되었다.

성덕왕 19년(720년)에 사냥꾼 이순석(李順碩)이 지장보살을 친견하고 감화를 입어 우리나라 제일의 지장성지인 석대암(石臺菴)을 흥림사 인근에 창건하였다. 이순석이 지장보살을 친견한 연유로 심원사는 살아있는 지장도량이라는 의미에서 ‘생지장도량(生地藏道場)’이라는 명성을 얻게 된다. 

고려 충렬왕 당시 민지(閔漬)가 기록한 「보개산석대사적기」에 따르면 영원조사가 산문을 연지 60여년 후 사냥꾼 이순석이 이곳에서 사냥을 하다 황금멧돼지를 보고는 활로 쏘아 맞혔는데 화살을 맞고 달아나는 황금멧돼지를 쫓아와 보니 멧돼지는 온데간데없고 작은 우물 안에 돌로 만든 지장보살상이 반쯤 잠긴채 앉아 있는 것이었다. 지장보살상을 자세히 보니 석상의 어께에 자신이 쏜 화살이 꽂혀있었다. 이순석이 놀랍고 두려워 석상을 꺼내려 했으나 그리 크지도 않은 지장보살상은 어찌나 무거운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에 이순석이 크게 뉘우치며 말했다.

“어리석은 중생을 깨우쳐주기 위해 지장보살님께서 나투신 뜻을 이제야 알겠습니다. 내일 다시 오겠으니 부디 우물에서 나와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출가하여 지장보살님을 모시고 지성으로 도를 닦겠습니다.”

다음날 와보니 과연 지장보살상이 우물에서 나와 옆 반석 위에 앉아 계셨다. 이순석이 곧 출가하여 이곳에 암자를 짓고 지장보살을 모셨다. 바로 심원사의 산내 암자 석대암이다.

심원사의 또 다른 산내 암자인 지장암에도 지장보살의 현신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지장암은 조선 후기 대 율사였던 남호 스님(1820~1872)의 출가인연처로 어려서 나병에 걸려 구걸하며 다니던 남호 스님은  이곳에서 출가해 21일간 용맹정진으로 지장기도를 올린 끝에 지장보살을 친견하고 나병을 깨끗이 고쳤다고 한다. 남호 스님은 현재 서울 강남 봉은사 판전에 봉안돼 있는 경판을 조성한 ‘동방의 대율사’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이처럼 심원사와 보개산 일원에는 지장보살의 현신과 관련된 설화가 무수히 전해지는데 민지는 이러한 이적을 기록하며 “보개산 전체가 지장진신이 늘 머물며 설법하는 곳”이라고 찬탄했다. (출처 : 법보신문, "한반도 중심에 ‘지장보살 상주처’ 복원")



원심원사에서 1시간 가량 산정상 방향으로 올라가면 최근 복원된 석대암이 나온다. 위에 보이는 철재 구조물이 지장보살을 모시고 있는 전각이다.

석대암에 모셔져 있는 지장보살님 뒤에 철원 심원사에 모셔져 있는 지장보살이 사진으로 모셔져 있다.



헌왕왕 3년(859년)에는 강릉지방에 침범한 왜군을 물리쳤다는 범일국사(梵日國師)가 흥림사를 중창하고 천불(千佛)을 봉안하며, 이듬해 성주암(聖住菴), 남암(南菴), 지장암(地藏菴) 등을 산내암자로 잇따라 창건했다.

조선 건국 당시인 태조 2년(1393년)에 흥림사는 불에 타 버린다. 무학대사(無學大師)는 태조 4년(1395년)에 절을 중건하고 산 이름을 보개산(寶蓋山)으로, 절 이름을 심원사로 개칭했다. 1398년에는 무학대사가 다시 성주암을 중수하고, 정종 2년(1400년)에는 심원사 스님들이 석대암을 중창했다. 이후 2백 년간 별 탈 없이 전승되던 심원사는 임진왜란을 만나 병화(兵火)로 소실되지만, 선조 28년(1595년) 인숭(印崇)스님과 정인(正仁)스님이 다시 중건한다.

재건된 심원사는 1907년 10월에 발발한 의병과 일본군과의 전투로 인해 다시 전소하게 된다. 전투에서 승리한 일본군이 화근을 없애기 위해 불을 놓은 것이다. 하지만 1908년부터 복구되기 시작하면서 다시 한번 일어선다.

1935년 석대암에 큰 이적이 일어났다. 독립운동가 한규설(韓圭卨)의 부인 박선심화(朴善心華)보살과 그녀의 동생 박대선화(朴大善華)보살은 남편의 극락왕생과 그들의 사후왕생을 발원하며, 화응(華應)스님을 모시고 백일기도를 드렸다. 백일기도를 끝내기 3일 전. 법당부근이 갑자기 환해졌다. 화응스님은 ‘불이 난 것이 아닌가’하고 급히 법당으로 갔다. 불이 난 것이 아니라 지장보살의 왼쪽 어깨 부분에서 서광(瑞光)이 뻗치고 있었다. 깜짝 놀란 스님은 대중을 깨우기 위해 종을 울렸다. 황급히 뛰쳐나온 두 자매도 서광을 보고 크게 감격했다.

서광이 있은 뒤, 두 자매는 심원사 주지 진학스님과 상의해 뜻 깊은 일을 하고자 했다. 숙의 끝에 공부하는 스님들은 위한 ‘화산경원’을 짓기로 결정하고, 그해 1만5천원을 희사해 토지 49,097평을 매입했다. 교과용 불경도 인출했다. 1936년 두 자매는 1만원을 더 희사해 철원군 월정리에 농장을 마련하고, 여기서 매년 나오는 1백석의 쌀로 화산경원을 운영하도록 했다. (출처 : 불교신문, "전국 제일 지장기도도량 심원사")

석대암에서의 지장보살 방광은 2007년에도 목격된다. (석대암에 가면 그 당시 촬영된 사진이 있다)

「원심원사는 9월 3일 자료를 통해 “지난 지장재일 전날인 8월 29일 밤 10시부터 새벽 5시까지 대구신도 130여명이 철야정진을 마친 이후 지장재일(30일) 아침 8시 50분경 20여명의 신도들은 원심원사에서 1.4Km 떨어진 석대암을 찾았다. 현재도 복원을 위한 발굴작업이 계속되고 있는 석대암을 찾은 보살들은 석대암 주위에서 방광하고 있는 놀라운 현상을 목격했다.”고 밝혔다. 이어 자료는 “그 광명은 석대암 돌탑주위에서 부채살처럼 차례차례 내비쳐 지고 있었다. 함께 석대암을 오른 한 보살이 이 순간을 핸드폰 카메라로 찍으면서(8시 55분) 사람들에게 전해지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원심원사는 이날 현장에 있었던 김선희 불자의 목격담도 상세히 소개했다. 심원사가 배포한 자료에 따르면 “카메라로 직접 부처님의 방광을 찍은 김성희 보살은 ‘너무 찬란해 방광인지 모르고 혼자 소장하려고 찍었는데, 그때의 순간을 다 담을 수 없는 것이 안타깝다’며 ‘태어나서 볼 수 있을까 말까한 것을 제가 보게 되어 너무 영광이다’고 말했다”고 전하고 있다.

또 “김성희 보살은 산을 오르며 70대의 노보살님을 부축해 올라가면서 ‘지장보살님, 이 보살님께서 마지막 가는 길이니 계시면 부디 조금 더 편하게 올라갈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라고 기도하며 올랐다”고 밝혔다.

출처 : 현대불교신문, "연천 원심원사 석대암서 지장보살 방광 (2007. 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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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년에 새롭게 복구된 심원사는 한국전쟁으로 다시 불에 타 사라졌다. 1951년 6월부터 ‘철의 삼각지’ 중 철원을 확보하기 위한 요충지가 보개산이 되면서 양측간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당시 UN군의 1주일에 걸친 융단폭격 후 국군이 주둔하면서 폐허로 변했다. 이 때 석대암ㆍ지장암ㆍ성주암ㆍ남암 등 59개에 달하는 부속암자도 모두 멸실됐다.

이렇게 한국전쟁으로 다시 절이 불에 탔고, 전쟁 후에는 당시의 절터가 비무장지대 안에 들어 있어 민간인의 출입이 통제되자 어쩔 수없이 주지 상수스님은 1955년 4월 연천군 신서면 하내산리의 옛터에서 철원으로 위치를 옮겨 조그마한 절을 짓고 심원사라 편액했다. 그리고 1963년 군사보호지역 안에 있는 심원사 법당기둥을 헐어다 철원 심원사 법당인 명주전(明珠殿)을 세우고, 많은 설화를 간직한 생지장보살상을 이곳으로 모셔왔다. 

1990년대 후반부터 심원사의 원 터에 복원의 빛이 들어왔다. 군사보호시설로 국유화됐던 옛 심원사 땅 250만 평을 1997년 영도 스님이 5년 간의 소송 끝에 되찾았다. 이어 2003년 연천군의 협조로 복원을 위한 발굴을 하고, 2004년에는 옛터에 극락보전 복원을 일궜다. 즉 철원의 심원사와 별도로 연천에 심원사를 재건하고 이를 '원심원사(元深源寺)'라 칭하였다.​

아직 불사 중이라 완전히 복원된 모습은 아닐 것으로 여겨진다. 대웅전을 중심으로 극락보전, 지장전, 산신각이 있다.

원심원사가 재모습을 완전히 갖추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특히 일주문과 범종각이 없는 것이 많이 아쉬웠다

‘생지장도량(生地藏道場)’이라고 불리는 심원사는 석대암 창건 설화 등 이미 소개한 이야기 이외에도 지장보살의 영험과 관련된 수많은 설화가 전해져 오고 있다. 먼저 장님이 눈을 떳다는 이야기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고려 제7대 임금 목종 때의 일이다. 경기도 연천 보개산 심원사에서 대종불사를 하게 되어 각지로 스님들이 시주를 걷고 있었다. 대광리에 사는 이덕기라는 장님과 박춘식이라는 앉은뱅이가 있었다. 이들은 어려서부터 죽마고우였는데, 이덕기는 열병을 앓다가 눈이 멀었고, 박춘식은 소아마비로 앉은뱅이가 되었다.

그들은 항상 자리에 모이기만 하면 신세한탄을 하였다. “무슨 죄가 많아서 우리는 이런 몸을 받았을까?” “남에게 못할 짓을 많이 했겠지. 금생에 받은 것을 보면 전생에 죄가 많아 이 지경이 되었을 거야. 그러니 금생에 좋은 일이나 많이 하세.”

하루는 어떤 스님이 찾아와서 “여보시요 시주님네, 적선공덕 많이 하소. 뜻하는 바를 이룰 것이오”라고 말했다. 덕운스님이라고 하는 이 화주스님의 말을 들은 이덕기와 박춘식은 눈이 번쩍 뜨이고, 다리가 곧장 펴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들은 가난하여 돈도 없고, 또 보탤만한 쇠붙이도 없었다.

그래서 궁리를 거듭하다가 이덕기는 “너나 나나 전생에 죄를 짓고, 불구자가 된 것도 원통하지만 박복한 중생이라 오늘날에 시주할 물건하나도 없으니 슬프지 않은가. 이렇게 앉아 궁상을 떨 것이 아니라 우리도 저 화주승과 같이 길거리에 나서 시주를 걷도록 하자”고 말했다.

그러나 다리가 오그라져 펴지 못하는 박춘식은 “말은 옳은 말이지만, 너는 앞을 보지 못하고 나는 걸음을 걷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한탄했다. 그러자 이덕기는 “내게 좋은 방법이 있네. 우리 두 몸이 한 몸이 되면 되지 않겠는가. 너는 걸음을 걷지 못하여도 눈이 성하고, 나는 보지 못하여도 다리는 성하니, 내가 너를 업고, 네가 가르쳐 주는대로 다녀 저 화주승과 같이 하면 곧 시주를 거둘 수 있지 않겠나?”

그리하여 그들은 거리로 나서 화주를 한지 3년이 되었다. 전국 방방곡곡 돌아 쇠붙이를 거둬 화주스님에게 건넸다. 그리하여 대종불사는 이루어지고 절은 중수되어 모년 모월 모일에 중수회향재와 대종준공식을 한다는 소식이 들렸다. 두 사람은 이 소식을 듣고 평지도 아닌 태산준령을 넘어 보개산 심원사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산에 오르니 재는 가파르고, 힘은 모자라 몸에서는 구슬같은 땀방울이 떨어졌다. 그러나 화주스님이 가르쳐준 “나무대자대비 관세음보살”을 한없이 부르며 간신히 그 산마루에 올랐다.

그때 박춘식이 외쳤다. “저기 저 부처님을 보아라!”하고는 이덕기의 등허리에서 내려 곧 부처님 곁으로 뛰어가려는 듯 몸부림을 쳤다. 순간 자신도 모르게 두 다리가 쭉 펴졌다. 그때 이덕기가 “어디, 부처님이 어디 있어?”라며 두 눈을 비비며 크게 뜨자 눈이 번쩍 떠졌다. 부처님은 공중에서 오색구름에 싸여 큰 빛을 이들에게 쏟으며 하늘 높이 올라갔다. 이덕기와 박춘식은 날이 밝도록 그 부처님께 절하며 서로 붙들고 울었다. 그 후로부터 그 재를 부처님을 뵌 고개라하여 ‘견불령(見佛嶺)’이라고 부르게 되었고 이덕기와 박춘식이 살았던 마을을 ‘부처님의 큰 광명이 머무르는 동네’라 하여 ‘대광리(大光里)라고 불렀다.​

출처 : 불교신문, "연천 보개산 원심원사"​

원심원사에는 부처님의 이마에 도끼가 박힌 사연의 이야기도 전해 온다.

옛날 강원도 철원군 보개산 심원사에는 강원공부를 마친 지 얼마 안 되는 묘선이라는 젊은 스님이 있었다. 매사에 의욕적인 스님은 어느 날 노스님을 모시고 산책을 하던 중, 노스님에게 절의 보수를 위해 백일기도를 하겠다고 다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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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로 백일기도에 들어간 묘선스님의 기도는 간곡하였고, 백일 회향하는 날 밤 꿈에 ‘내일 아침 일찍 화주를 구하러 나가서 맨 처음 만나는 사람이 심원사 중창불사의 시주가 될 것’이라는 부처님의 계시를 받게 되었다. 잠에서 깬 묘선은 들뜬 마음으로 길 떠날 채비를 하고 노스님께 인사를 드렸다.

그러나 묘선스님이 막 산문 밖을 나서는데 웬 나무꾼 하나가 아침 일찍부터 나무를 하고 있었다. 그냥 지나치려다 꿈 생각이 난 묘선스님이 나무꾼을 자세히 살펴보니, 아랫마을에 사는 머슴 박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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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 스님은 실망감을 감추지 못한 채, ‘머슴 박씨가 우리 절 중창불사 시주가 될 수는 없을 텐데…. 그냥 지나갈까’ 하며 망설였다. 그러나 부처님의 말씀에 따라 첫번째 만난 머슴 박씨에게 다가가 공손히 인사하고 간밤의 꿈 이야기를 들려주며 시주가 되겠느냐고 물었다. 박씨는 한동안 묵묵히 생각에 잠겼다.

“오십 평생 못간 장가, 이제 가서 뭘 하겠나. 차라리 그 동안 머슴살이로 모은 재산을 절 짓는데 보시하여 부처님께 공덕이나 지어야지.”

그렇게 마음을 결정하고 기쁜 마음으로 심원사의 시주가 되리라는 불심을 세웠다. 그 후 박씨는 40년간 모은 전 재산을 시주하여 심원사 불사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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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슴 박씨가 시주를 한 그날부터 시름시름 앓기 시작하더니 그만 자리에 몸져눕고 말았다. 그러나 돈을 모두 절에 시주한 터라 박씨는 약도 쓸 수 없었다.

주인집에서는 머슴이 일을 못하고 눕게 되자 공밥을 먹일 수 없다며 박씨를 절로 보냈고, 절에서는 박씨를 위해 극진히 간병하면서 정성껏 기도를 올렸으나 차도가 없었다. 날이 갈수록 병은 악화되었고 끝내 박씨는 죽고 말았다.

마을에서는 묘선 스님이 순진한 머슴 박씨를 속여 재산을 모두 빼앗고 결국은 죽음에까지 이르게 했다며 이웃동네까지 소문이 퍼졌다.

더 이상 심원사에 머물 수 없게 된 묘선스님이 절을 떠나기로 결심하고, 새벽예불을 올리기 위해 법당으로 들어갔다. 희미한 촛불 속의 부처님을 바라보는 묘선스님의 눈에는 원망이 가득했다.

“가피는커녕 시주자를 죽게 한 부처님”

이라는 생각을 갖게 된 묘선스님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 헛간으로 발길을 옮겼다. 스님의 손에는 어느새 도끼가 들려 있었고, 법당의 부처님 이마에는 순식간에 도끼가 내려쳤다.

그길로 절을 나와 전국을 만행하는 묘선스님의 발걸음은 늘 무겁기만 했다.

심원사 부처님 이마에 박힌 도끼가 빠지지 않는다는 소문은 전국에 퍼졌으며, 그렇게 30년이 지난 어느 날 묘선스님은 심원사 부처님께 용서를 빌고 자신이 그 도끼를 뽑고 싶은 생각이 들어 심원사로 돌아왔다.

절은 30년 전 불사가 중단된 모습 그대로였고, 법당 문밖에서 안을 들여다보니 부처님의 이마에는 도끼가 그대로 박혀 있었다. 묘선스님은 참회하는 마음에 가슴이 찢어지듯 아팠다.

마침 그때 법당에는 돈독한 불자로서 새로 부임한 젊은 사또가 부처님 이마의 도끼를 손수 뽑겠다며 와 있던 중이었다. 법당에 들어선 사또는 삼배를 올린 후 부처님 이마의 도끼를 뽑자, 의외로 도끼는 쉽게 쑥 빠지는 것이었다.

도끼를 들여다본 사또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도끼에는 「화주 시주 상봉」이라는 여섯 글자가 새겨져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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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습을 문밖에서 바라보고 있던 묘선스님은 그때 비로소 부처님이 머슴 박씨를 죽게 한 뜻을 깨달았다. 스님은 사또 앞으로 나아가 불상에 도끼가 박힌 내력을 이야기하며, 사또가 30년 전에 죽은 이 절의 시주자인 머슴의 환생이라고 말해주었다.

지금까지 내력을 들은 사또는 ‘시주 화주 상봉’이란 바로 오늘의 인연을 부처님께서 미리 예언하신 뜻이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순간 일어나 스님에게 삼배를 올렸다.

사또는 스님께 머리 조아리며,

“부처님의 뜻으로 인연 맺어 스님과 제가 다시 만났으니 심원사 불사의 모든 비용을 시주하리라”

고 다짐하였다.

이에 사또는 스님을 봉양하고 심원사 중창불사의 화주가 되었다.

이후 스님의 공덕으로 심원사 중창불사는 30년 만에 다시 시작되었고, 묘선스님은 심원사를 중창한 후 큰스님이 되어 많은 신도를 교화했다고 전한다.​

(출처 : 문화콘텐츠탓컴, "심원사 부처님 이마의 도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