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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사 이야기

산풀내음 2018. 11. 5. 20:55



조계사(曹溪寺)는 일제치하인 1910년 조선불교의 자주화라는 염원과 함께 한용운, 이희광 스님 등에 의해 각황사라는 이름으로 창건된 사찰이다. 1937년 각황사를 현재의 조계사로 옮겼고 이듬 해인 1938년에 삼각산에 있던 태고사(太古寺)를 이전하는 형식을 취하여 절 이름을 태고사로 했다. 그리고 1954년 일제의 잔재를 몰아내고자 하는 불교 정화운동 후 이름을 조계사로 바꾸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조계종 및 조계사의 조계는 중국 선종이 크게 흥했던 중국 조계산에서 비롯되었다. 조계산은 중국 선불교의 육대 조사인 혜능대사 (慧能, 638-713)께서 주석하셨던 산의 이름이다.

육대 조사 혜능


달마대사가 인도에서 중국으로 건너가 부처님의 참된 법을 전하시니 그 법은 그의 제자를 통해 전해젼 내려왔고 당나라 때 흥인 대사가 다섯 번째 큰 어른, 즉 오대 조사가 되셨다. 흥인대사의 문하에는 많은 제자가 있었고 그 중에서도 신수라는 뛰어난 제자가 있었다. 하지만, 흥인대사는 신수는 부처의 참된 법을 전하기에는 부족함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노씨 성을 가진 나무꾼이 '부처가 되는 법을 구하겠다'며 절에 들어왔다. 그는 어려서 부친을 여의고 홀어머니를 모시며 땔나무를 팔아 연명하던 가난한 나뭇꾼 소년이었다. 어느날 한 손님이 '금강경'을 읽는 것을 보고 문득 마음이 밝아져, 곧 어머니를 하직하고 황매의 빙무산으로 가서 오조 홍인대사를 예배하였던 것이었다.

홍인대사께서 그가 범상치 않은 인물임을 알았지만, 오히려 그를 꾸짖으며 방아나 찧으라고 후원으로 보냈다. 그때부터 노씨 성을 가진 나무꾼은 한 행자승이 이끄는대로 방앗간에 가서 여덟 달 동안 방아를 찧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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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홍인대사께서 문하생들을 다 불러 말했다.

"너희들은 각기 반야의 지혜를 써서 게송 한 수씩을  지어 나에게 가져오거라. 내가 너희들의 게송을 보고 만약 큰 뜻을 깨친 자가 있으면 그에게 가사와 법을 부촉하여 육대 조사가 되게 하리라."

사람들은 물러나와 의논했다. 그리고 그들은 "신수(神秀) 화상은 우리들 중의 대사형이므로 굳이 우리들이 게송을 지어 큰스님에게 바칠 필요가 없다. 신수 사형이 법을 얻은 후에  육조가 되면 되지 않겠는가?"라고 했다

신수는 이것을 알고 심한 부담감을 느껴 번민을 하다가 사람들이 다 잠이 든 삼경(三更)에 남쪽의 복도에 몰래 게송을 적었다.

신시보리수(身是菩提樹)  몸은 보리의 나무요​

심여명경대(心如明鏡臺)  마음은 밝은 거울의 대와 같나니​

시시근불식(時時勤拂拭)  때때로 부지런히 털고 닦아서​

물사야진애(勿使惹塵埃)  티끌과 먼지 않게끔 말지니라.

홍인대사는 아침에 게송을 보고 신수가 쓴 것임을 즉각 알아보고 신수에게 말했다.

"네가 지은 이 게송은 소견(所見)은 당도했으나 다만 문앞에 이르렀을 뿐 아직 문안으로 들어오지 못했다. 범부들이 이 게송에 의지하여 수행을 하면 삼악도에 떨어짐은 면하리라."

한 동자가 방앗간 옆을 지나면서 이 게송을 외고 있었는데 그때 우연히 노씨는 그것을 들었다. 그는 한 번만 듣고도 단번에 이 게송이 큰 뜻을 알지 못한 것임을 알았다. 그는 본래 글을 쓰지 못하는지라 그 동자에게 부탁하여 자신이 읊는 게송을 복도에 쓰게 했다.

보리본무수(菩提本無樹)  보리는 본래 나무가 없고

명경역비대(明鏡亦非臺)  밝은 거울 또한 틀이 아니네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  본래 한 물건도 없는데

하처야진애(何處惹塵埃)  어느 곳에 티끌과 먼지가 묻으리오.

오조 대사께서 이 게송을 보시고는 흡족하셨지만 대중들이 시기를 할까 염려하여, “이것도 견성구(見性句)가 아니다.”라고 하면서 그 게송을 지워 버렸다. 나중에 아무도 모르게 혜능이 방아를 찧고 있는 곳을 찾아가서, “방아는 다 찧었느냐?”하고 한 마디 말을 거니, “방아는 찧은 지가 오래됩니다만 아직 택미(擇米)를 못했습니다.”라고 혜능이 답을 했다. 그래서 오조 대사는 주장자로 방앗대를 세 번 치고는 돌아와 버렸다. 삼경(三更)이 되면 아무도 몰래 찾아오라는 신호였다.

그래서 밤중에 혜능이 방으로 찾아 들어오니, 오조 대사께서 불빛이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도록 가사(袈裟)를 가지고 휘장을 쳐서 은밀하게 금강경을 설하고 그 동안 내려 온 가사와 발우를 전하고 혜능이란 이름도 정해주면서, 육대조(六代祖)로 봉(封)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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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너는 육조가 되었다. 부처님 법을 잘 받들고 널리 중생을 제도하여라.

달마 대사께서 처음 이 땅에 오셨을 때, 사람들이 믿음이 없었으므로 가사와 발우를 전하여

믿음의 표시로 삼았느니라. 그러나 이제 사람들이 믿음에는 관심이 없고 나쁜 무리들이

오직 가사와 발우 만을 탐하여, 너를 해칠지도 모르니, 이후로는 전하지 말도록 하여라.

내 이제껏 너를 숨긴 것은 그런 무리들로부터 너를 보호코자 함이었다.

앞으로 불법이 너로 말미암아 크게 일어나리라. 너는 되도록 남방으로 가거라.

그리고 때가 되기 전에는 절대로 불법을 설하지 말라. 불법을 일으키는 일이 쉽지 않으리라.”

혜능은 홍인 대사에게 하직 인사를 올리고 남쪽으로 향하여 갔다. 그 뒤 때가 이르자 혜능 대사는 조계산에 보림사를 세우고, 온 중국에 선의 가르침을 널리 폈다.

일주문. 조계사는 오랫동안 일주문이 없었으나 2005년 3월 조계사 중창불사 당시 일주문 건립 기공식을 갖고, 2006년 10월 9일 현판과 주련을 달아 최종 완공하다. 

以心傳心是何法 이심전심시하법

佛佛祖祖唯此傳 불불조조유차전

마음에서 마음에 전하는 법이 그 무슨 법인가

부처님이나 역대 조사가 오직 이것을 전함이로다.

曹溪山上一輪月 조계산상일윤월

萬古光明長不滅 만고광명장불멸

조계산 꼭대기에 둥근 달처럼

만고에 이 지혜광명 영원히 멸하지 않네. ​

일주문 안에 사천왕이 모셔져 있다.

대웅전. 대웅전에는 석가모니부처님을 주불로 좌측에는 아미타부처님, 우측에는 약사여래부처님을 모시고 있다. 2000년도에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27호로 지정되었다. 1938년 건립되어 1963년 한 차례 보수한 바 있고, 2001년부터 2006년에 걸쳐 중수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특히 대웅전은 전각뿐 아니라 목조석가모니불(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26호)과 그 후불도로 봉안되었던 영산회상도(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25호), 그리고 30점의 벽화 등 귀한 여러 점의 성보로 유명하다.

천진불. 2006년 3월22일에 봉행되었다.

8각10층부처님진신사리탑. 본래는 1930년에 조성된 7층석탑이었지만 우리나라 전통양식에 맞지 않고 왜색을 띄고 있다는 지적에 따라 2009년 8각 10층탑으로 새롭게 건립되었다. 탑의 외부에는 8여래상, 8보살상, 8신중상 등을 부조 장엄하였고, 내부에는 1913년 스리랑카로 부터 전해진 부처님 사리 1과를 봉안하고 소형불상 일만 사천 분을 모셨다.


부처님 진신사리 이야기


1913년 8월 스리랑카의 불자 다르마 팔라(1864-1933)가 미국으로 갔다가 귀국 길에 우리나라를 들렸다. 조선을 방문한 다르마 팔라는 조선불교도들에게 귀중한 선물을 주었는데 세존의 불골(佛骨), 즉 석존의 진신 사리였다. 각황사에 모셔진 사리는 7층 석탑이 조성되어 자리를 잡으니 이때가 1930년 10월 14일이다. 7층 석탑은 원주(院主) 이윤근씨를 비롯한 여러 신도들의 도움을 받아 조성되었다. 이후 어느 때인가 현재의 조계사 터로 이운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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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불교계에 진신사리를 기증한 스리랑카 다르마 팔라(1864 ~ 1931)를 한자로 의역하면 호법(護法)이다. 다르마 팔라는 그 이름처럼 근대에 들어 스리랑카 불교를 부흥시킨 사람 중 한명이다. 다르마 팔라는 외세의 지배로 침체에 빠져 있던 스리랑카의 국민에게 용기와 희망을 불어넣어 주고, 다방면으로 불교를 전파시키기 위해 노력한 현대인 중의 한 사람이다. 다라마 팔라는 1891년 초 불교 성지순례를 떠났는데 부다가야의 폐허를 보고는 세계 각국의 불교도들에게 ‘어찌 우리가 불타 세존께서 도를 이루신 이곳 부다가야를 이렇게 황폐한 상태로 방치할 수 있는가?’라는 호소문을 보냈다. 그 후 부다가야의 부지를 불하받아 대각회에서 사용하려 했으나 힌두교도를 앞세운 인도 정부의 비협조로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말았다. 다르마팔라는 임종의 자리에서 다음 생에는 힌두교도 브라만의 가정에 태어나 불교도가 부다가야를 찾을 수 있도록 하는데 도움이 되겠다고 서원할 만큼 이곳에 애정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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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년에 그는 스리랑카인들의 용기를 북돋우기 위해 다시 나라 전체를 순회하며 종교적, 문화적 자부심을 호소했다. 그 후 북인도와 남인도를 차례로 방문해 불교를 중심으로 한 평화와 문화의 재창달을 호소하면서 특히 남인도에서는 카스트 제도와 불가촉천민들에 대우의 부당성을 지적하기도 했다. 1913년 하와이를 방문했던 다르마 팔라는 귀국길에 한국을 들렀다. 이 때 사리를 기증한다.

세계 각국의 여러 도시에 대각회의 지부를 결성하여 수시로 드나들면서 포교에 힘쓰던 그는 1931년 7월 13일 드디어 아나가리까(Angarika, 재가 독신 생활)를 청산하고 승단에 입문하게 된다. 1933년 1월 16일에는 많은 승려들의 축하를 받으며 구족계를 받았다. 그리고 1933년 4월 28일, 스리랑카 불교의 부흥뿐 아니라 불교의 세계화에 정열을 바쳤던 다르마팔라는 임종을 맞이한다.

(출처 : 불교포커스, "부처님 진신사리는 어떻게 조계사로 왔을까?", http://www.bulgyofocus.net/news/articleView.html?idxno=65403)


관음전

극락전. 대웅전을 바라보고 왼편에 자리 잡고 있다. 조계사 극락전은 영가와 선망 조상들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재를 올리던 덕왕전을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건립으로 인해 2003년 11월 해체함에 따라 한 달 뒤인 12월, 기존의 문화교육관을 개조해서 새롭게 탄생시킨 전각이다. 극락전에는 아미타부처님을 중심으로, 좌우에는 각각 관세음보살님과 지장보살님이 모셔져 있다. 그리고 그 좌우 측면으로 십대명왕이 자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