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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오는 새벽에 찾은 길상사

산풀내음 2018. 11. 25. 14:51


길상사에는 일주문과 천왕문 등이 없다. 그냥 '삼각산길상사'라 쓰여 진 현판이 있는 큰 대문이 우리를 맞아준다.


눈 내리는 새벽 성북동에 위치한 길상사(吉祥寺)를 찾았다. 본래는 고급 요정이었던 '대원각'이 1995년 '대법사'라는 사찰로 탈바꿈한 뒤 다시 1997년 '길상사'로 이름을 바꾼 곳이다. 이렇듯 길상사의 이전 모습은 고급 요정이라고들 하지만 나의 기억 속에 있는 길상사는 고급 음식점이다.

지금은 눈 내리는 겨울 문턱이지만 내가 처음 길상사를 찾은 것은 중3 시절이었던 1980년 여름이었다.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와 가족과 함께 처음 찾은 '소갈비'를 파는 음식점이 바로 당시 대원각이었던 것이다. 지금도 흔적이 남아있는 개울가의 작은 정자 같은 곳이 바로 그곳이다. 당시에도 아버지께서 이곳은 청와대 사람들과 정치인 들이 많이 찾는 곳이고 저녁에는 술을 파는 곳이라고 했는데, 그 의미가 지금 돌이켜보니 요정을 의미했던 것 같다. 부처의 계율에 어긋나 출입이 금기시되었던 장소에서 부처를 모시는 불법을 전파하는 장소로 변했으니 중생들에게 또다른 의미를 주는 곳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공덕주 김영한 보살님의 공덕비를 따라 조금 더 올라가면 개울가에 작은 건물들이 보인다. 지금은 공부하시는 스님들께서 참선 수행 정진을 하는 곳이지만 예전에는 바로 이곳에서 음식을 팔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경제적으로 남부럽지 않았던 시절이었고, 좋지 않았던 부모님의 관계도 조금씩 회복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던 당시의 기억을 지금 돌이켜 보니 무엇인지 모르는 아쉬움이 몰려온다. 그리고 몇년 지나지 않아 닥친 어려움에 방황하고 배회했던 나의 지난 모습들과 함께. 누구를 탓하겠는가? 모든 것이 내가 지은 업보의 결과이거늘 ....

어려움을 잘 이겨내도록 나를 지켜주신 부처님과 불보살님들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리고 억겁의 윤회의 시간 동안 지은 업보를 참회하는 마음으로 오늘도 기도를 올린다.

길상사의 주불전인 극락전이다. 아미타불을 주불로 좌우에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을 모시고 있다.


길상사는 공덕주(功德主) 김영한(1916 ~ 1999, 법명 길상화) 보살님과 법정(法頂, 1932 ~ 2010) 스님의 깊은 인연에 기인한다.

김영한 님은 매우 부유한 집안의 세째 딸로 태어난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었지만 그래도 생활은 넉넉하였다고 한다. 불행은 한꺼번에 몰려온다고 했던가. 15살의 어린 나이에 결혼하지만 남편은 이내 세상을 떠나 청상과부가 된다. 이 무렵 친정 집안도 친척에게 속아 하루 아침에 재산을 모조리 날리면서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가난의 늪에 빠지게 된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서 그리고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16살의 어린 나이의 그녀가 택한 길이 바로 기생의 길이었다. 그녀의 발걸음이 닿은 곳은 기생조합인 조선권번이었지만, 유독 춤과 노래에 재능을 보였던 그녀는 당시 조선권번에서 궁중아악과 가무를 가르친 금하 하규일의 문하에 들어가게 된다. 즉 술과 몸을 파는 기생이 길이 아니라 한국의 전통 춤과 음악을 계승하는 예능인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하지만 김영한 님의 어머니는 딸이 기생이 됐다는 소식에 죽는 날까지 딸을 찾지 않았다고 한다.

억척스러운 노력의 결과 그녀는 스승으로부터 '진향'이라는 기명을 받는다. "깨끗하고 청정한 물은 잡스러운 내음을 풍기지 않는다”는 ‘진수무향(眞水無香)’에서 따온 이름이었다. 그리고 얼마 뒤 스승은 노환으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고 그렇게 세월은 흘렀다. 

20세가 되는 해, 독립운동 단체 흥사단의 한글학자 신윤국의 도움으로 그녀는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하지만 자신을 지원해주던 스승이 조선어학회사건으로 투옥되자 함흥으로 돌아와 그 스승을 옥바라지했다. 그런 가운데 22살 때 그곳 함흥에서 고교선생이던 시인 백석(白石, 1912~1996)​을 만나 운명적인 사랑에 빠지고 만다. 백석은 영한에게 '자야(子夜)'라는 아호를 지어주고, 3년간 동거를 하였지만 백석의 아버지는 둘을 떼어 놓고 아들을 다른 여자와 강제 결혼시킨 것이다. 그러나 백석은 혼인 첫날 밤 도망쳐 다시 영한과 동거했다. 하지만 영한은 젊은 자기 남자 백석을 걱정하며 헤어지자고 했다. 하지만 백석은 오히려 외국으로 떠나자고 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석의 앞날을 더 걱정한 영한은 아예 백석에게서 사라져 버린 것이다. 마침내 백석은 홀로 러시아로 떠났고 이것으로 둘은 영영 만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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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을 사랑한 그녀는 평생 백석의 생일인 7월 1일에는 식사를 하지 않았고, 길상사에 기부된 당시 시가 천억에 달하는 대원각 재산에 대하여 "그 많은 재산이 아깝지 않느냐"는 기자의 물음에 "천 억은 그 사람(백석)의 시 한 줄만 못하다"고 대답했다고 할 정도로 백석을 그리워했다고 한다.​

김영한 님과 백석


한국전쟁 이후인 1953년 중앙대 영문과를 졸업해 ’백석, 내 가슴속에 지워지지 않는 이름’, ’내 사랑 백석’ 등의 책을 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공부에 매진하면서도 악착같이 일해 재산을 모았다. 그리고 이름을 ‘김숙’으로 바꾸고는 본격적인 사업 전선에 뛰어들었다.1955년, 사업가 ‘김숙’은 당시 배밭골이라 불리던 성북동 인근의 이만 평 대지를 매입했다. 매입가만 무려 650만원, 당시로서는 어마어마한 금액이었다. 그녀는 인연이 닿아 있는 모든 연줄을 활용해 가까스로 650만원을 마련했다. 어렵사리 땅을 소유하게 됐지만 욕망의 후유증은 깊고 길었다. 그녀는 무려 17년간 빚을 갚아야 했다. 필요할 때마다 땅을 떼어 팔다보니 2만평 부지가 어느새 7000평만 남았다.​

김숙은 이 곳에 목조건물을 짓고, ‘청암정’이라는 이름의 한식당을 열었다. 1970년 12월 청와대 인근 삼청동과 성북동을 잇는 삼청터널이 개통되면서 땅값은 급등하였고, 대원각에는 고위 정치인과 재력가들이 드나들기 시작하면서 점차 밀실정치의 요새가 되었다. 마침내 한식당으로 시작한 그곳은 3공화국 시절 국내 3대 요정(삼청각, 청운각, 대원각) 중에 하나인 '대원각'이 되었고, 그녀에게는 엄청난 부와 힘을 쥐어 주었다. 하지만 그녀의 한켠에는 항상 허전함이 있었다고 한다.

“부귀도 영화도 다 부질 없었어. 모든 게 백석의 열정 담긴 시 한 줄만 못했지.”

김영한 님과 법정스님의 인연은 198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대원각의 운영에서 손을 땐 김영한 님은 법정 스님의 '무소유'를 읽고 큰 감명을 받았고, 카톨릭 신자였던 그녀는 불교로 개종(改宗)하게 된다. 그리고 1987년 미국에 체류할 당시 로스앤젤레스 고려사에 설법 차 들른 법정스님을 만나 대원각 7000여평(당시 시가 1000억원)을 시주하겠으니 절로 만들어달라고 요청하게 된다. 법정 스님은 이를 간곡히 사양하였으나, 김영한 님은 10년 가까이 법정 스님을 찾아와 끈질기게 부탁했다.

마침내 그녀의 뜻을 받아들인 법정 스님은 1995년 6월 13일 대한불교조계종 송광사 말사인 '대법사'로 등록한다. 1997년에 '맑고 향기롭게 근본도량 길상사'로 이름을 바꾸어 재 등록하였고 12월14일 창건법회를 갖는다. 

1997년 12월14일 길상사 개원식에는 한국 가톨릭의 수장인 김수환 추기경이 이례적으로 참석, 길상사의 개원을 축하해 주었다.


이날 길상사의 회주(會主) 법정스님은 개원 인사말을 통해 이렇게 다짐했다.

저는 이 길상사가 가난한 절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절은 더 말할 것도 없이 안으로 수행하고 밖으로 교화하는 청정한 도량입니다. 진정한 수행과 교화는 호사스러움과 흥청거림에서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

어떤 종교 단체를 막론하고 시대와 후세에 모범이 된 신앙인들은 하나같이 가난과 어려움 속에서 신앙의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었습니다. 주어진 가난은 우리가 이겨내야 할 과제지만 선택된 맑은 가난, 즉 청빈은 삶의 미덕입니다. 풍요 속에서는 사람이 병들기 쉽지만 맑은 가난은 우리에게 마음의 평화를 이루게 하고 올바른 정신을 지니게 합니다. 오늘과 같은 경제난국은 물질적인 풍요에만 눈멀었던 우리에게 우리 분수를 헤아리게 하고 맑은 가난의 의미를 되돌아보게 하는 계기이기도 합니다.

이 길상사는 가난한 절이면서도 맑고 향기로운 도량이 되었으면 합니다. 불자들만이 아니라 누구나 부담없이 드나들면서 마음의 평안과 삶의 지혜를 나눌 수 있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이날 법정스님은 대원각을 시주하여 길상사를 만들게 해준 김영한 님에 대한 보답으로 ‘길상화(吉祥華)’라는 법명(法名)을 내리고 108염주 한 벌을 손수 보살 님의 목에 걸어주었다.


법명과 염주를 받은 길상화 보살님은 수천명의 대중 앞에서 자신의 바람을 이야기했다.

저는 죄 많은 여자입니다. 저는 불교를 잘 모릅니다만…

저기 보이는 저 팔각정은 여인들이 옷을 갈아입는 곳이었습니다.

저의 소원은 저곳에서 맑고 장엄한 범종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입니다.


김영한 님은 세상을 떠나기 하루 전인 1999년 11월13일 길상사를 찾았다. 오랜 병환으로 지치고 노쇠한 모습이었지만 언제나처럼 정갈한 한복 차림이었다. 길상화 보살은 법당을 참배하고 천천히 경내를 둘러본 후 죽은 뒤 반드시 화장해서 눈이 많이 오는 날 길상사 경내에 뿌려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경내 자신의 처소 ‘자야오당’에 누웠다. 그리고 다음 날인 11월14일 108염주 한 벌을 목에 건 채 83세의 나이로 이 세상을 떠났다.

유골은 49재 후 유언대로 길상헌 뒤쪽 언덕에 뿌려졌다. 길상사는 유골이 뿌려진 자리에 조그만 돌로 소박한 공덕비를 세우고 매년 음력 10월7일 기재를 지낸다.

길상화 보살님의 공덕비


길상화 보살님의 극락왕생을 기원합니다.



법정스님 이야기


법정 스님은 무소유(無所有)의 정신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수십 권이 넘는 저서를 통해 자신의 철학을 널리 전파해 왔다. 전라남도 해남군 우수영(문내면)에서 태어나 우수영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당시 6년제 였던 목포상업중학교에 진학했고 이후 전남대 상대에 입학하여 3년을 수료하였다. 그는 당시에 일어난 한국 전쟁을 겪으며 인간의 존재에 대해 의문을 가지게 되었고, 대학교 3학년 때인 1954년에 출가를 결심하게 된다. 그리고 오대산으로 떠나기로 했던 그는 눈길로 인해 차가 막혀 당시 서울 안국동에 있던 효봉 스님을 만나게 된다. 효봉 스님과 대화를 나눈 그는 그 자리에서 머리를 깎고 행자 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바로 다음 해에 사미계를 받은 후 지리산 쌍계사에서 정진했다. 1959년 3월에 양산 통도사에서 자운 율사를 계사로 비구계를 받았으며, 1959년 4월에 해인사 전문 강원에서 명봉 스님을 강주로 대교과를 졸업했다.



강원도 산골의 주인 없는 오두막을 빌려 홀로 땔감을 구하고 밭을 일구며 그야말로 ‘무소유’의 청빈한 삶을 실천하셨던 스님은 우리 시대 가장 순수한 정신으로 손꼽혀 왔다.


젊은 시절 함석헌, 장준하 선생 등과 함께 민주수호국민협의희를 결성하고, 유신 철폐운동에 참여할 만큼 시대의 잘못을 아프게 고민하시면서도 불교의 가르침을 지키는 출가수행자로서의 본분을 잃지 않으셨고 ‘무소유’와 ‘맑고 향기롭게’를 스스로 끊임없이 실천하셨던 스님이다.

법정 스님은 수필집 ‘버리고 떠나기’, ‘무소유’, ‘산방한담(山房閑談)’, ‘아름다운 마무리’, ‘산에는 꽃이 피네’ 등 20권이 넘는 대중저서를 출간해 불교계의 대표적인 문인으로 자리매김했다. 1997년 창건한 길상사에서는 2003년까지 회주를 맡기도 했다.

1997년 12월 14일에는 서울 성북동의 길상사 개원법회에 한국 천주교 성직자인 김수환 추기경이 참석하여 축하해 주자, 이에 대한 답례로 1998년 2월 24일에 명동 성당을 방문하여 특별 강연을 가져 종교간의 화합을 보여 주었다. 법정스님은 천주교 수녀원과 수도원에서도 자주 강연했고, 그의 산문집과 경전번역서들은 수녀들 사이에서 큰 관심을 받았다. 초기불교 연구로 유명한 일아 스님 등 일부 수녀 출신 비구니 스님들은 법정스님의 저술에 감명을 받거나 법정스님과 만난 후 비구니가 됐다는 출가 이력을 소개한 바 있다.​


법정 스님은 '사후에 책을 출간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겨, 그의 저서들은 모두 절판, 품절되었다. 그 후 그가 쓴 책들의 수요가 늘어 일부 책들은 가격이 10만 원 가까이 치솟을 만큼 품귀 현상이 빚어졌다. 저작권자가 절판 유언을 남겼더라도 출판권은 출판사에게 있기 때문에 더 출판할 가능성이 있다는 관측이 나왔으나, 법정의 책을 출판하는 출판사들은 그의 유언을 존중하여 모든 책을 절판하기로 합의하였다.

법정 스님은 2007년 폐암으로 항암 치료를 받았지만 2009년 재발해 삼성서울병원에서 투병해 오다가 서울 성북동 길상사로 거처를 옮겨 열반에 들었다. 생전에도 ‘무소유’를 강조하던 법정 스님은 ‘“많은 사람 수고만 끼치는 일체 장례의식 하지 말라. 관과 수의를 따로 마련하지 말고, 이웃에 방해되지 않는 곳에서 지체 없이 평소 승복 입은 그대로 다비하라. 사리를 찾으려고 하지 말며 탑도 세우지 말라.”는 마지막 말씀을 남겼다.


여전히 우리에게 '무소유'의 가르침을 이야기 하고 계신 듯하다.


"무소유란 아무것도 갖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다는 뜻이다.

우리가 선택한 맑은 가난은 부보다 훨씬 값지고 고귀한 것이다."

"버리고 비우는 일은 결코 소극적인 삶이 아니라

지혜로운 삶의 선택이다.

버리고 비우지 않고는 새것이 들어설 수 없다.

공간이나 여백은 그저 비어있는 것이 아니라,

그 공간과 여백이 본질과 실상을 떠받쳐주고 있다."

"삶은 소유물이 아니라 순간순간의 있음이다.

영원한 것이 어디 있는가. 모두가 한때일 뿐 그러나,

그 한때를 최선을 다해 최대한으로 살 수 있어야 한다.

삶은 놀라운 신비요, 아름다움이다."


경내에는 극락전, 지장전, 설법전 등의 전각이 있으며 행지실, 청향당, 길상헌 등의 요사가 존재한다. 2011년 이후 덕운 스님이 주지로 취임하였으며, 불교 자선재단 맑고향기롭게의 근본도량으로써 여러 가지 사회사업을 펼치고 있다(길상사의 주지가 맑고향기롭게의 이사장을 겸하고 있다). 또한 경내에 있는 관음보살 석상은 천주교 신자이자 가톨릭예술가인 최종태가 건립한 것으로, 같은 조각가가 혜화동성당에 건립한 성모 마리아 석상과 닮아 있다.


법정스님은 2000년 4월28일 봉헌된 길상사의 관음보살상의 제작을 독실한 천주교 신자 조각가 최종태 전 서울대 교수에게 맡겨 또 한번 화제가 됐다. 덕분에 지금도 길상사 마당에 선 관음보살상은 성모마리아의 모습을 닮았다.​

법종각

법정스님을 모시고 있는 진영각










일아(一雅) 스님과 법정 스님의 인연


일아 스님은 처음에 수녀였다. 지금처럼 파르라니 깎은 머리가 아니었다.

“서울여대에 다닐 때부터 목이 말랐어요. 영화에도 미쳤었고, 음악에도 미쳤었죠. 한때는 모든 팝송을 다 외울 정도였죠.” 그렇게 문학과 여행에도 미쳤었다.

“그런데도 목이 말랐죠. 그걸 통해선 ‘완전한 인간’에 대한 갈망이 채워지질 않더군요.”

그는 고민했다. ‘시집을 갈거냐, 수도자가 될거냐.’ 결국 수도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비구니 스님은 머리를 빡빡 깎잖아요. 그게 너무 낯설었죠. 그래서 수녀가 되기로 했어요.”

집에선 난리가 났다. 어머니는 몸져눕고, 오빠는 “이게 부모님께 대한 보답이냐?”며 그의 뺨을 때렸다. 유명 정치인이었던 아버지는 “왜 자연을 거스르며 살려고 하느냐”며 호통을 쳤다. 그 앞에서 그는 “아버지, 저를 붙들어 매시겠습니까?”하고 되물었다.

결국 그는 서울 샬트르성바오로수녀원에 입회했다. 그리고 가톨릭 신학원을 졸업한 뒤 수녀가 됐다. 그렇게 6∼7년 가량 수녀로 살았다. 그러나 종신서원을 하진 못했다.

“가톨릭은 너무나 매력적인 종교입니다. 엄숙하고, 자아에 대한 절제도 강하죠. 그리고 점잖죠. 2000년간 이어온 가톨릭의 전통에는 분명 힘이 있어요. 다만 저와 적성이 맞질 않았을 뿐이죠.”

그는 자신에게 물었다. ‘내가 여기서 계속 살 수 있을까?’ 그리고 ‘아니오’란 답을 얻었다. 그 길로 그는 수녀복을 벗었다.

“막막하더군요. 딱히 갈 데도 없었죠.” 그때 ‘법정 스님’이 생각났다.

사실 법정 스님과는 일면식도 없는 사이였다.

“수도회 수련원에서 도서관 소임을 맡은 적이 있었죠. 그때 법정 스님 책을 많이 읽었어요. 당시 수녀님들 사이에서 법정 스님의 인기가 ‘짱’이었죠.”

그는 무작정 송광사 불일암으로 갔다. 거기서 법정 스님을 만났다.

“자초지종을 설명한 뒤 물었죠. ‘올바른 수행을 할 수 있는 장소와 그걸 가르칠 수 있는 스승이 있는 곳으로 보내달라’고 말이죠.”

법정 스님은 장문의 편지와 함께 그에게 조계종 비구니 특별선원인 석남사를 소개했다. 그는 석남사에서 행자 생활부터 다시 시작했다.

“수도 생활은 이미 겪었죠. 밥하고, 청소하고, 빨래하고. 힘들 건 없었어요.”

행자 생활을 마치고 그는 운문사 승가대학에서 공부를 했다.

“그런데 참 궁금했어요. 기독교에선 예수님의 직설이 담긴 ‘신약성경’이 있잖아요. 저는 그걸 외우다시피 했어요. 그런데 승가대학에선 부처님의 직설이 담긴 팔리어 초기 경전을 배우질 않더군요. 중국 선사들의 얘기만 가르쳤죠.”

그가 궁금한 것은 ‘붓다’였다. 붓다는 어떤 사람이었나. 그의 일거수, 일투족은 어땠나. 그걸 보고 싶었다.

결국 그는 미얀마의 마하시명상센터로 떠났다. 부처가 목숨 걸고 수행했던 위빠사나 수행에 일아스님 역시 '여기서 수행을 끝내겠다'는 죽을 각오로 2년 동안 달려들었다. 매일 새벽 3시에 일어나 저녁 11시까지 4시간 자는 고행이었다.

“거기서 2년간 목숨을 걸고 수행을 했어요. 부처님 당시의 초기 불교수행법으로 말이죠. 그때 절감했어요. 불교는 정말 ‘수행의 종교’구나.”

그는 태국의 위백아솜 위파사나 명상수도원에 가서도 수행을 했다.

그런 뒤 미국으로 갔다. 법정 스님을 찾아가 인사도 올렸다.

배웅을 하던 법정 스님은 그에게 “뒤돌아 보지 말고, 앞으로 달려라”고 말했다.

일아 스님은 미국의 뉴욕 스토니브룩 주립대에서 종교학을 전공했다. 그리고 석·박사 학위를 받은 뒤 LA로메리카 불교대학의 교수가 됐다. LA갈릴리 신학대학원에선 불교학 강의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