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사진/서울

삼각산 아래 금선사를 찾아서 ...

산풀내음 2019. 6. 30. 16:40


지난 주에는 대학 친구들과 함께 북한산에 있는 진관사와 삼천사를 다녀왔고 이번 주에는 역시 북한산 자락에 있는 금선사를 다녀왔다. 금요일 저녁까지만 해도 경북 예천에 있는 용문사를 생각하였으나 어쩌다보니 토요일은 친구들 상가(喪家)에 다녀오는 것으로 하루를 보내야만 했다. 그리고 하루에 두곳의 상가를 들러 친구를 위로해 본 것은 태어나 처음이었다.


다들 죽어가고 언젠가는 죽는 것인데 보내는 사람들의 허전함은 왜일까? 그렇게 죽고 다시 태어나면서 윤회의 쳇바퀴에 갇혀 살아가는 것이 중생인 것을 ....


아침에 일어나 내가 향한 곳은 사실 금선사가 아니라 승가사였다. 분명히 승가사라고 네비게이션에 입력했는데 그 녀석이 날 데려다 준 곳은 금선사 아래 비봉탐방소 입구였다. 이것도 인연이겠지 하는 생각에 몇발자국 올라가니 금선사 목정굴(木精窟)이 나왔다.


금선사 목정굴은 영조의 환생설화(금선사에서는 영조가 아니라 순조라 하며 순조 탄신일에는 제를 지낸다)와 관련하여 농산스님께서 300일간 기도를 한 곳으로 유명한 곳이다. 여기서 환생설화를 먼저 살펴보자.


금선사와 파계사에는 각각 환생설화가 전하고 있다. 두 내용 모두 기도와 환생이라는 같은 맥락을 지니고 있고 기도와 환생의 주체이신 스님 역시 같은 분이다. 다만 그 이야기의 시점과 환생하신 대상에 있어서 약간의 차이가 있다. 금선사의 환생설화는 조선 정조 때 일어난 일로 당시 파계사의 용파(龍坡)스님께서 정조를 만나 '승려들이 기도정진할 수 있도록 여러 폐단을 없애줄 것'을 간언하고 정조는 대신 조건으로 '왕위를 이을 아들'을 요구한다. 용파 스님은 금선사의 농산(聾山) 스님과 함께 기도 정진하여 농산 스님께서 정종의 수빈 박씨의 몸을 빌어 환생하니 이 분이 바로 '순조'라는 것이다.

한편 파계사에서 전하고 있는 환생설화는 숙종 때의 일이다. 파계사의 현응(玄應) 스님(현응스님의 법명은 용파였는데 현응은 뒷날 숙종이 내린 시호이다)이 숙종의 당부에 따라 금선사의 농산 스님과 기도 정진하여 농산 스님께서 숙빈 최씨에게 현몽하고 환생하였다고 한다. 이 분이 바로 영조이다.

다음과 같은 이유로 파계사에서 소개하고 있는 환생설화를 중심으로 소개하고자 한다.

1) 사적기에 따르면 신라 애장왕 5년(804년)에 심지왕사(心地王師)에 의해 창건된 파계사는 조선 선조 38년(1605년)에 계관(戒寬) 스님이 중창했고 이어 현응 스님(용파 스님)이 숙종 21년(1695년)에 삼창했다. 영조(英祖)는 1694년 10월 31일(음력 9월 13일)에 숙종(肅宗)과 숙빈 최씨(淑嬪 崔氏)의 사이에 태어난다. 희빈 장씨에게서 태어난 경종의 배다른 아우가 되는 것이다.

2) 현응 스님이 건립하고 그 곳에서 수도했다는 파계사 성전암(聖殿庵) 가는 길목엔 현응 스님의 부도가 서 있으며 성전암에는 현응대사의 영정과 벽화가 보존되어 있다. 그리고 전생에 농산 스님이었던 영조가 11세에 썼다는 현응전(玄應殿)이란 편액이 지금까지 성전암 법당에 걸려 있다.

3) 1979년 6월에는 파계사 원통전 관세음불상을 개금하던 중 복장(腹藏, 불상과 불화 내부에 안치하는 종교적 물목(物目))되어 있던 영조대왕의 어의가 발견되어 영조와 관련된 설화의 신빙성을 입증해 주었으며, 숙종의 하사품 중 병풍 2점과 구슬 2개도 현존하고 있다. ​

때는 조선 숙종조 중엽.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이 극심하여 전국의 절마다 스님들은 부역 아니면 궁중에서 쓰는 종이와 노끈 미투리 등을 삼느라 혹사당했다. 팔공산 기슭의 천 년 고찰인 파계사(把溪寺)도 예외는 아니었다. 파계사란 이름은 절 좌우 계곡에 흐르는 9개의 물줄기를 흩어지지 못하게 잡아 모은다는 뜻에서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당시 파계사 주지 현응(玄應) 스님(당시의 법명은 용파 스님이었다)은 어떻게든 위정자들을 만나서 사중에 할당되는 부역을 없애보리라는 원을 세우고 한양으로 간다. 그러나 승려의 도성출입 금지조항으로 숭례문 안에는 들어가지도 못한 채 물을 길어다 주는 일을 하며 3년 세월이 흘렀고, 부처님의 자비를 비는 기도만 밤낮없이 계속되었다. 그만 파계사로 발길을 돌리기로 결심하던 날 밤에 현응스님은 숭례문 근처의 봉놋방에서 한양에서의 마지막 밤을 지냈다.

그날 밤 숙종은 숭례문 근처에서 청룡이 승천하는 꿈을 꾸었다. 참으로 기이하다고 생각한 숙종은 내관을 시켜 숭례문 근처를 살피게 했다. 어명을 받아 아침 일찍 숭례문 근처로 나아가 인근을 살피던 내관은 행장을 꾸려 막 길을 떠나려는 현응 스님과 마주쳤다. 비록 행색은 남루하나 눈빛이 예사롭지 않고 인품이 달라 보여 내관은 현응 스님을 은밀히 어전으로 안내했다.

"그대 이름은 무엇인고?"

"용파(龍波)라 하옵니다."

그 당시 현응스님의 법명은 용파였는데 현응은 뒷날 숙종이 내린 시호였다.

"무슨 용자를 쓰느냐?"

"용 龍 자입니다."

숙종은 범상치 않은 인품에다 용(龍)자 이름을 지닌 현응 스님의 신상을 상세히 물었다. 현응 스님 역시 절호의 기회다 싶어 자신의 신분과 사찰 실정을 밝히면서 불교 탄압을 탄원했다.

"마마,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이렇게 불교를 탄압하게 되면 나라에서는 큰 인물이 나지 않을 것입니다. 통촉하여 주옵소서."

숙종은 현응 스님의 간곡하면서도 강력한 청에 마음이 움직였다.

"내 그대의 청을 들어 주겠소. 대신 늙은 나에게는 아직 왕통을 이을 자손이 없으니 대사는 무슨 방법으로든지 태자를 얻게 해 줄 것을 부탁하오."

"부처님 전에 정성을 들이면 성취를 이루지 못하는 일이 없사오나 저 혼자로서는 어렵사오니 삼각산(지금의 북한산) 금선암(金仙庵)에 있는 소승의 도반인 농산(聾山)과 같이 기도하게 해 주십시오."

숙종(1661-1720)은 당시 인경왕후, 인현왕후 등 정비에는 아들이 없었고, 역사적으로 유명한 희빈 장씨와의 사이에 훗날 경종(1688-1724)이 되는 아들이 있었다. 그리고 농산대사(聾山大師)는 금강산 만회암(萬灰庵)에 주석하다가 마침 한양 가까이에 와 있던 중이었다.​

입궐하여 숙종을 알현하고 나온 두 스님은 각각 3백일을 기한으로 정하고 각각 기도를 시작했다.

기도 중에 현응 스님은 삼매에 들어 혜안으로 살펴보니 숙종의 사주에는 세자가 있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왕자 탄생도 여간한 복덕과 지혜가 아니면 아니 되는지라 농산이나 자기가 아니고서는 왕자가 될 만한 사람이 없음을 알았다. 현응스님은 농산스님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적어 보냈다.

「우리가 다 같이 임금의 은혜를 받고 있는데 모처럼 부탁하시는 소청을 들어 드리지 아니하면 백성된 자의 본의가 아닌즉 송구하오나 농산 그대가 전생(轉生)하여 왕자가 되셨으면 어떻겠소. 내가 마땅히 그러해야 할 일이지만 너무나도 벌려 놓은 일이 많아 아직 때가 이른가 하오.」  

농산 스님은 편지를 받아 보고 「견성성불을 목적하는 승려가 왕자로 태어난다는 것은 본의가 아닌 줄 아오나 현응스님의 소청이 그러하니 말세의 불법을 위하여 그리하겠소」라고 답서를 써 보냈다.​

3백일 기도가 끝나는 날 밤 숙빈 최씨의 꿈에 "저는 삼각산 금선암에서 나라의 기도를 하고 있는 농산이라는 승려입니다. 용파스님의 권유로 상감의 대를 잇고자 왔사오니 부디 물리치지 마십시오."하면서 숙빈 최씨의 몸속으로 합장하고 들어왔다.

숙종 임금은 숙빈 최씨의 꿈이야기를 듣고 즉시 사람을 보내어 알아보니 농산 스님이 회향일 저녁 제자들에게 “50년 동안이나 망건을 쓰고 있어야 한단 말인가”하고 탄식한 뒤 앉은 채로 입적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농산 스님이 300일 관음기도를 한 곳이 바로 지금의 금선사 목정굴(木精窟)이다.

이렇게 농산 스님은 숙빈 최씨에게 현몽한 뒤 그 이듬해인 1694년에 왕자로 환생했으니 그가 바로 1724년부터 52년간 재위하여 학문과 예술의 전성시대를 이룬 영조대왕이다. 태자를 얻은 숙종의 기쁨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임금은 용파 스님에게 현응이란 시호를 내렸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파계사를 중심으로 40리에 걸쳐 나라에서 거두던 세금을 모두 절에서 거둬 들이도록 하였으나, 현응 스님은 이를 거절하였다. 대신 경내에 선대 임금님의 위패를 모실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청을 하였고 숙종은 쾌히 윤허했다. 

현응 스님은 즉시 파계사로 내려가 숙종22년(1696년)에 기영각(祈永閣)을 세우고 선조, 숙종, 덕종 및 영조 임금의 위패를 차례로 모시니 지방 유생과 양반의 행패는 자연히 끊어지게 되었다. 기영각은 후일 어필각(御筆閣)으로도 불리었다.

한편 전생에 농산 스님이었던 영조는 임금이 된지 14년이 지난 1740년 12월에 현응 스님이 머물렀던 파계사 원통전을 중건하고, 관음보살상을 개금하면서 자신이 입고 있던 도포를 보살상의 복장을 모실 때에 유물로 넣었고, 이 도포는 1979년 관음보살상 개금 때 발견돼 윤회전생의 사실을 일깨웠다할 것이다. 이 도포는 현재 중요민속자료 제220호로 지정돼 있다.


'금선(金仙)’은 바로 부처님을 지칭하는 말이며 따라서 금선사(金仙寺)​는 ‘부처님 절’이라는 뜻이 된다. 금선사의 창건 연대는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지만, 고려말에서 조선초에 무학 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조선 왕조의 도읍을 정하려고 삼각산에 올라 지세를 살피던 중에 지금의 금선사 터에 서기가 서려있음을 보고 절을 세웠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에 소실되었고, 이후 1955년 도공 스님이 중건했다. 1994년 법안 스님이 부임한 후에야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비봉탐방소에서 20m정도 산을 오르면 목정굴과 금정사 일주문으로 가는 갈림길이 나온다. 목정굴은 농산스님이 300일 기도 후 영조(금선사에서는 영조가 아니라 순조라 하며 순조 탄신일에는 제를 지낸다)로 환생한 기도성지


목정굴에 모셔져 있는 수월 관음보살


* 수월관음 水月觀音


관세음보살로서 33응신(應身) 중 하나. 양류관음(楊柳觀音)이라고 하는데, 관세음보살이 중생의 소원을 이루게 하는 것이 마치 버드나무가지가 바람에 흔들리는 것과 같다고 하여 붙인 명칭이다. 또한 백의를 입고 있는 경우에는 백의관음(白衣觀音)이라고 한다.


수월관음은 물가의 바위에 수목(樹木), 대나무 등을 배경으로 하여 걸터 앉은 모습으로 표현되는데, 주변에는 버드나무가 꽂힌 정병과 연꽃, 산호초 등이 있다. 이는 《화엄경華嚴經》의 입법계품에 나오는 보타락산을 배경으로 그린 것이다. (출처 : 월간미술)




목정굴 수월관음보살님 뒷편으로 작은 굴길이 있는데 이곳을 따라 올라가면 법회를 보는 반야전이 나온다. 반야전 앞에는 200년 넘은 소나무가 자리잡고 있는데 이를 지나 108계단을 오르면 금선사의 주불전인 대적광전이 있다. 대적광전에는 비로자나불, 노사나불, 석가모니불 삼존불을 모시고 있다.​

​​

비로자나부처님을 중심으로 좌측에는 노사나불, 우측에는 석가모니불

10여명의 젊은이들이 Temple Stay 중이었는데 이 중 몇분이 스님과 차담을 하고 있었다.

물에 버슷 등을 넣고 이를 우려내기 위하여 불을 지피시고 계시는 보살님께서 오늘 점심공양은 국수인데 시간에 맞춰 와서 먹으보라고 하셨지만 ....저 불과 함께 공양주님의 정성으로 만든 것은 전부 맛날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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