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사진/서울

추석에 찾은 화계사와 삼성암(2)

산풀내음 2019. 9. 14. 23:31


삼성암 독성각에 모셔진 나반존자님


화계사 일주문에서 개울물을 건너 약 700m~800m 정도, 나의 걸음걸이로는 약 20분 남짓 산길을 따라 걸어 올라가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독성기도도량인 삼성암(三聖庵)을 만날 수 있다. 독성은 ‘나반존자’라고도 하는데, 혼자 수행하여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수기를 부처님께 받고, 남인도 천태산에서 홀로 수행해 깨달음을 얻은 분이다. 삼성암은 청도 운문사(雲門寺) 사리암(舍利庵)과 북한 묘향산 중비로암과 함께 우리나라 3대 독성기도처로 365일 신도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삼성암이 다른 사찰과 다른 점은 승려에 의하여 창건된 것이 아니라 재가신도(在家信徒)에 의해 창건되었다는 것이다. 

신도 박선묵(朴先默)은 16세에 발심하여 불교에 귀의하였다. 그는 한양의 신도 유성종, 서윤구, 고상진, 이원기, 장윤원, 유재호 등 7인과함께 고종 7년(1870) 봄에 화계사 뒤 천태굴(天台窟, 독성이 수도하던 곳이 남인도 천태산이다)에서 3일 동안 지성껏 독성기도를 드렸다. 기도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박선묵은 절의 창건을 제안하는데 그 약속을 이행하여 고상진이 1872년에 창건한 것이다. 창건 초기에는 ‘소난야(小蘭若)’라고 불렸다. 즉 삼성암은 박선목의 발의로 고상진이 창건한 재가불자들의 소박한 수행도량이었다. 여기에서 `소난야'의 `난야'는 `아란야(阿蘭若)'의 준말로 사문이 수행하기 좋은 공한처(空閑處), 즉 사원을 말한다고 한다.

그 뒤 1881년에 박선묵이 독성각(獨聖閣)을 신축하고 절 이름을 삼성암(三聖庵)으로 바꾸었으며, 1936년에는 동운(東雲)이 신도 김용태(金容泰)의 시주를 얻어서 칠성각(七星閣)을 중건하였다. 1942년 7월 폭우로 인한 산사태로 절이 무너지게 되자 화계사(華溪寺) 주지 회경(會鏡)이 중창의 뜻을 세워 중현(重玄)·성섭(性攝)과 함께 대방 12칸을 세웠으며, 1943년 7월에는 혜운(慧雲)이 독성각을 다시 세웠다.

현재의 대표적인 전각으로는 대웅전을 가운데에 두고, 독성각과 칠성각이 좌우에 각각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일주문을 지나 가장 먼저 만나는 전각의 2층에는 명부전이 있다.

삼성암 일주문에는 '삼각산 삼성사'라고 되어 있다.



대웅전에는 석가모니불을 주불로 좌우 관음, 지장보살이 협시했다. 아미타불과 관음보살 사이엔 현재 삼존불 전 본존불이던 작은 아미타불이 있었다고 한다. 이 부처님은 한국전쟁 때 심원사(당시 철원 보개산 심원사, 현 원심원사)가 불타게 되자 거기 살던 스님들이 천불전에 있던 부처님을 업고 피난하여 모셔오게 된 것이라 한다. 삼존불 양쪽으로 아미타 천불을 봉안해 있다.


대웅전 바라보는 곳에서 오른쪽에는 나반존자를 모시고 있는 독성각이 있다. 독성각은 대웅전에서 약간 올라가는 위치에 있고 3명 정도만 기도할 수 있을 정도로 작은 규모이어서 아래 쪽에 독성각을 바라보면서 기도할 수 있는 별도의 공간으로 투명유리를 설치한 응공전이 따로 마련되어 있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방금 전 다녀온 화계사에서도 그리고 이곳에서도 나한전에서 기도를 올렸다. 다만 화계사의 천불오백성전에서는 지장보살님을 찾으며 조상님들을 위한 기도를 올렸다면 이곳에서는 나반존자의 명호를 가슴 속에서 부르면서 나와 나의 가족을 위한 기도를 올렸다.




대웅전을 바라보고 왼편에는 독성각이 있고, 오른편에는 관세음보살님이 모셔져 있다

독성각 아래에는 독성각을 바라보며 기도할 수 있는 공간인 응공전이 있다.


독성각에서 바라본 삼성암 대웅전



독성기도도량으로 이름난 삼성암은 수많은 기도 영험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다. 이 중에서 불교신문에 소개된 두가지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충남 공주에 미곡상을 하는 임선달이라는 사람에게는 수동이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어렸을 때 병이 들어 곱사등이가 되었다. 임선달은 아들의 병을 고쳐주고자 이곳저곳 알아 보았지만 병이 깊어갈 뿐이었다. 수동이 25살이 되던 어느 날는 외가 친척인 지월스님(일제시대 때 조선불교계에 이름 높은 회명스님의 상좌였다)이 찾아와 수동을 자신에게 맡겨 기도로 병을 치료해 볼 것을 권유한다.

지월스님은 수동을 데리고 서울 삼각산 화계사 뒤편에 위치한 삼성암으로 올랐다.

“이곳이 너의 기도처다. 여기에서 50일 동안 무념의 상태로 ‘나반존자님’의 명호를 부르거라. 오직 네 마음속에는 한 생각만 자리 잡아야 할 것이야.”

수동은 그동안 자기가 불구자로 살아온 한을 풀겠다는 일념으로 나반존자를 부르는 독성기도를 불철주야로 하기 시작했다.

50일째 되던 날도 임수동은 밤 늦도록 나반존자를 부르며 기도를 드리다 잠이 들었다. 꿈 속에서 한 소년이 찾아와 임수동을 어떤 노인에게 데리고 갔다. 노인은 넓은 반석 위에 앉아 색동옷을 입은 18명의동자들에게 이야기 하고 있었는데, 임수동이 절을 하자 장애인인 것을 위로해 주며 소매 속에서 금과 은으로 만든 침을 꺼내 가슴과 등에 놓았다. 노인은 침을 놓은 후 “한달 후에는 병이 완쾌될 것이니 속히집으로 돌아가라”고 말했다. 임수동은 노인에게 무수히 예배하다 깨었다.

아주 눈앞에 있었던 것 같이 생생한 묘한 꿈이었다. 50일 기도를 회향한 수동은 지월스님에게 자청해 한 달간 기도를 더 하겠다고 말했다. 이후 수동은 몸에서 이상한 기운이 감지됐다. 매일같이 달라지는 몸의 기운을 감지한 수동은 한 달이 되자 거짓말 같이 허리를 반듯하게 일으키는 기적이 일어났다.

1926년 회산스님이 주지로 있을 때의 일이다. 서울 신촌에 김윤기라느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부친 김치종씨는 10년 동안 신경통을 앓아 매일 고통 속에서 살고 있었다. 병이 더욱 악화되어 걷지도 못하게 되자 전국에 유명한 명의를 찾아 나섰다. 수소문 끝에 충청도 당진에 90살이나 되는 고령의 심씨란 의원이 용하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심씨를 찾아 갔지만 너무 노령이라 김윤기의 간절한 청을 거절할 수 밖에 없었지만 계속된 간절한 청에 결국은 심씨는 서울도 문진을 가게 된다. 진료를 마친 심씨는 이 병은 그 어떠한 명약과 침 등으로도 치료할 수 없고 단 한가지 방법이라면 '산삼, 특히 동자산삼' 밖에 없다고 한다.

​김윤기는 곧바로 삼성암 뒤 바위에 초막을 치고 칠칠기도에 들어갔다.

“나반존자님, 나반존자님. 제 아비의 병을 고칠 수 있도록 동자삼을 점지해 주십시요.”

49일째 기도를 회향하던 날 김윤기는 현몽을 통해 독성님을 만나게 되었다. “너의 정성이 갸륵하구나. 허나 나는 동자삼을 가지고 있지 않으니, 내 친구인 불암산 산신에게 빌려 너의 소원을 들어주겠다. 아침일찍 독성각을 들러보거라.” 깜짝 놀란 김윤기는 아침이 오기 무섭게 독성각 문을 열었다. “아니, 이게 어찌된 영문인가!” 독성각 쟁반위에는 어린아이 모양을 한 주먹만한 동자삼이 놓여있었다. 김윤기는 한없이 눈물을 흘리며 감사의 뜻을 전하고 산을 내려와 아버지에게 동자삼으로 약을 지어 올렸다. 김치종 노인은 그것을 먹은 후 3일간을 꼼짝도 안하고 누워서 잠만 자고 있었다.

김윤기도 아버지 옆에서 3일 동안 지켰다. 그러던 김노인은 기지개를 펴고 일어나면서 “내가 그 동안에 잠이 푹 들어 있었구나”하고 다리와 팔을 움직여 보았다. 그런데 쑤시고 아픈 증세가 씻은 듯이 깨끗하게 없어지고 사지가 자유롭게 움직여졌다. “아들아, 너의 효성이 나를 살렸구나.” 이후 김노인은 90여 세까지 아무 병이 없이 살았다고 한다.

출처 : 불교신문, "④ 서울 수유동 삼성암 나반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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