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사진/서울

추석에 찾은 화계사와 삼성암 (1)

산풀내음 2019. 9. 14. 16:06


숭산큰스님


BTN 최고의 인기 프로그램인 광우스님의 '소나무'를 보면서, 광우스님께서 기거하시는 화계사는 가장 가고 싶은 사찰 중에 하나였다. 이런 저런 핑계로 미뤄오다가 추석 아침에야 비로소 삼성암과 함께 다녀오게 되었다. 화계사는 현각 스님으로 주목을 받아온 한국 불교의 세계화에서 그 중심에 계셨던 숭산 큰스님께서 계셨던 곳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화계사 일주문을 지나 북한산 계곡물을 따라 올라가는 길은 도심을 지나면서 방금 전까지의 풍경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도시와 산중이 찰라의 순간에 바뀌는 것과 같이 속세와 천상도 마음 하나 다시 돌아봄에 바뀔 수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화계사(華溪寺)는 고려 시대 탄문(坦文) 대사가 세운 보덕암(普德庵)을 조선 중종 17년(1522년)에 신월선사(信月禪師)가 현재의 위치로 옮겨 세운 사찰이다. 그러나 채 100년도 지나지 않은 1618년에 화재로 전소되었고, 이듬해 3월 도월(道月)이 선조의 아버지인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의 도움으로 재건하였다. 그리고 1866년에는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도움으로 용선(龍船)과 범운(梵雲) 양 선사가 불전과 승방 건물들을 중수하였다.

화계사는 흥선대원군의 원찰이라 불릴 정도로 흥선대원군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특히 흥선대원군의 둘째 아들(고종)이 왕위에 오르게 된 일화가 화계사에 전해진다.

어느 여름날, 대원군이 남루한 차림으로 화계사를 찾았다. 너무 목이 말랐는데, 때마침 느티나무 아래에서 동자승이 기다렸다는 듯이 물 사발을 건네주는 것이 아닌가. 신기해서 연유를 물으니 만인(萬印)이라는 스님이 시켰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원군은 만인을 만나게 되었으며, 만인은 대원군의 심중을 꿰뚫어 보고는 자손이 왕위에 오를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충청도 덕산(德山)의 가야사(伽倻寺) 금탑 자리가 제왕지지(帝王之地)이니, 남연군(흥선대원군의 아버지) 묘소를 그곳으로 이장하면 제왕이 될 귀한 왕손을 얻을 것’이라고 한 것이다.

후에 대원군이 가야사를 찾아가 돈을 써서 금탑을 허물고 그 자리에 남연군의 묘를 썼다. 본래 남연군의 묘는 경기도 연천에 있었으니, 500리나 되는 곳으로 옮긴 것이다. 묘를 이장한 지 7년 후인 1852년에 둘째 아들 재황을 낳았는데, 그가 바로 조선의 제26대 왕인 고종이다. 12살에 왕위에 올랐으므로 대원군이 오랫동안 섭정을 하게 되었다. 이러한 인연으로 대원군은 절 중창을 위해 시주를 하였으며, 전각 곳곳에 자신의 글씨를 써놓기도 하였다.

(출처 : 화계사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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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의 화계사는 해외포교의 중심지로써의 역할도 수행하고 있다. 당시 화계사의 조실로 계셨던 숭산 행원 큰스님(1927-2004)께서는 1966년 일본을 시작으로  69년 홍콩, 72년 미국, 74년 캐나다, 78년 폴란드, 80년 영국, 81년 스페인, 83년 브라질, 85년 프랑스, 89년 남아공, 93년 싱가포르 등등에 40여년의 세월 동안 전 세계를 돌며 32개국 120여 개의 홍법원을 개설, 5만 여명이 넘는 외국인 제자들을 양성하였다.


한국 선불교의 최고봉인 경허와 만공 선사의 법통을 이어받은 숭산 큰스님은 여러 사찰의 존경받는 선사로 국내에서 활동하다, 나이 마흔이 넘어 모든 것을 버리고 미국행 비행기를 탔다. 영어 한마디할 줄 모른 채 일부러 한국 사람들이 없는 곳에 정착한 큰스님은 세탁소에 취직해 수리공으로 일하면서 사람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처음 프로비던스의 브라운대학 학생들이 숭산 선사에게 매료되어 찾아오기 시작했고, 그의 소문은 하버드대학과 예일대학 등 미국의 각 대학 학생과 교수들에게 퍼졌다. 숭산 선사의 ‘오직 모를 뿐(Only Don't Know)'라는 메시지와 몽둥이 30방에 미국 대학생들은 끝없이 머리를 얻어맞으며 깨우치기 시작했고, 큰스님을 중심으로 미국에 최초의 한국 선원이 자생적으로 만들어졌다.

(출처 : 불교포커스, "숭산스님의 100가지 가르침, 스티븐 미첼 <부처가 부처를 묻다>")

* '부처가 부처를 묻다'라는 책은 숭산 큰스님 법문과 제자들과 나눈 문답, 서신 등을 엮은 책이다.

국내보다는 서구세계에 더 잘 알려져 있는 숭산스님은 한국 선불교를 가장 앞서 세계에 알린 분으로 '한국의 달마'라고 불리었으며, 서구인들로부터는 티베트의 달라이 라마, 베트남의 틱낫한, 캄보디아의 마하 고사난다 스님과 함께 세계 4대 생불(生佛) 중의 한 명으로 추앙받았었다.

화계사 국제선원


숭산 스님께서 해외에 심은 불교는 한국의 조계종과는 다소 다르다. 각 지역의 문화적 특수성에 맞게 형식이 변용되었는데 그래서 '관음선종(Kwna Um School of Zen)'이라는 새로운 종파가 만들어졌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는 재가자(평신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미국적 환경에 맞추기 위해 재가불자도 승복을 입을 수 있고, 결혼 여부에 상관 없이 스님의 계를 내려주었다. 그리고 단순화된 공안으로 각 단계를 차례로 통과하여 선사의 자격을 주는 등 출가자와 재가자가 엄격히 구분되는 한국의 전통과는 많이 다르다.

(출처 : OhmyNews, "한국불교 세계화의 선구자 숭산스님")

해외 포교에 독보적인 활동을 한 숭산 선사의 원력으로 한국 불교가 세계 곳곳에 널리 퍼졌고, 많은 외국인들이 한국의 불교, 문화, 역사, 언어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숭산 스님의 해외포교를 계기로 화계사에는 외국인 수행자를 위하여 1984년에 보화루에 국제선원을 개원하였다. 1991년에 대적광전이 세워지자 1992년에 재개원을 하고 이곳에서 매년 여름과 겨울 안거를 실시하는데 꽤 많은 외국인들과 국내 불자들이 참여한다.

2000년 3월 계룡산에는 무상사가 창건되었다. 무상사는 한국의 선에 관심 있는 전 세계 사람들이 수행하는 국제적인 선원이며, 매년 수백 명의 외국인들이 찾고 있다. 많은 외국인 제자들이 계룡산 국제선원에서 수행하여 법사나 선사가 된 후, 자국으로 돌아가 선원을 세우고 한국식 불교를 가르칠 수 있기를 희망했던 숭산 선사의 뜻이 유지되고 있는 곳이다.

(출처 : 불교포커스, "숭산스님의 100가지 가르침, 스티븐 미첼 <부처가 부처를 묻다>")

일주문을 조금 올라가면 부도전이 나오고 그곳을 지나면 바로 숭산스님을 떠올리게 되는 국제선원이 왼편에 있다. 오른편 앞으로는 1991년 정수스님이 조성한 대적광전이 나온다. 비로자나불을 주불로 좌우측에 노사나불과 석가모니불을 삼신불을 이루고 있어며 협시보살로는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 보현보살, 문수보살을 모셨다. 화계사에서 가장 큰 규모의 대적광전을 지나 조금 더 오르면 화계사의 주법당인 대웅전이 나온다. 대웅전 좌측엔 천불오백성전과 삼성각이 있고 우측엔 명부전이 있다. 


대적광전, 1층은 공양간으로 사용되고 있다.


화계사로 오르면서 처음 본 두 법당, 국제선원과 대적광전의 규모가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 컷기 때문일까, 화계사의 규모가 엄청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대웅전, 명부전, 천불오백성전 등을 한 눈에 본 첫 느낌은 너무나도 아담하다는 것이었다. 앞의 두 건물이 아버지의 느낌이라면 이곳은 엄마의 품속과 같았다.


범종루 옆 이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대웅전이 나온다


화계사의 주 법당은 1870에 용선(龍船)과 초암선사가 흥선대원군의 주를 받아 지은 대웅전이다. 법당에는 석가모니불을 주불로 좌우에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협시불로 모셔져 있다. 이 삼존불은 근래에 조성된 것이라고 한다. 후불탱화는 1875년에 화산스님이 조성한 것으로, 주불은 석가모니불이 아니고 아미타불이다. 아미타불 주변으로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 보현보살, 문수보살, 지장보살 등과 사천왕, 십대제자 등이 그려져 있다.



대웅전 왼쪽에는 본래 관음전이 있었는데, 1974년에 화재로 소실되었다고 한다. 관음전 역시 창건 초기부터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단지 관음전에는 자수관음상이라는 특이한 유물이 전해져 오는데. 이 자수관음상은 1875년에 왕실에서 내린 것으로, 이 상을 봉안하기 위해 1876년에 초암스님이 관음전을 중수하였다고 전해온다. 지금은 천불오백성전이 있는데 석가모니불, 관세음보살,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오백나한을 모시고 있는 곳이다. 그런데 다른 곳의 나한전에서 모셔진 나한님들과는 사못 다르다. 


천불오백성전에 모셔져 있는 나한님들


이곳에 모셔진 나한님은 최기남이라는 분이 모셔온 것이라고 하는데, 이 분은 1915년 관직에서 물러나 금강산에 들어가 십팔 나한상과 천불상, 사천왕상 등의 조각에 열중했다고 한다. 그리고는 여주 신륵사에 자신이 조성한 조각상등을 봉안했다가 이후 화계사로 옮겨와 최기남의 가족이 천불오백성전을 짓고 모시게 된 것이다. 대웅전, 명부전, 대적광전에는 발을 드릴 수 없을 정도로 기도하시는 신도들로 가득차 오늘은 이곳에서 기도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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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계사 명부전인 현재의 건물은 고종 16년(1878년)에 새로 지은 것이다. ​당시 화계사는 왕실의 적극적인 후원을 받던 절로서 왕명으로 나라에서 가장 뛰어난 지장보살과 시왕상을 옮겨 모시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한다. 그리하여 황해도 배천의 강서사에 있던 목조지장보살삼존상(보물 1822호)과 시왕상이 선정되어 이곳 화계사로 모시게 되었다. 이때 이 지장보살과 시왕상을 봉안하기 위하여 초암스님이 조대비(趙大妃)의 시주를 받아 명부전을 건립하게 된 것이다.

(출처 : 화계사)


화계사 법당들이 있는 곳의 맞은 편에는 2018년에 새롭게 모셔진 미륵부처님이 계셨다. 미륵부처님 뒤편 감실에는 인도, 티벳, 라오스, 중국, 미얀마 스리랑카 등 12개 국가에서 조성한 불상 12분을 이운해 모셔져 있는데, 나라마다 조금씩은 다른 부처님의 모습이지만 중생을 바라보는 자애로우심은 한결 같았다.








 '추석에 찾은 화계사와 삼성암(2)'의 내용이 궁금하시면 아래의 링크를 눌러주세요. 

http://blog.daum.net/gmania65/1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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