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사진/서울

옥천암 백의관음

산풀내음 2019. 9. 15. 17:30


옥천암은 나에게 형언할 수 없는 아쉬움과 함께 나의 부족함에 대하여 많은 생각을 하게끔 한 사찰이었다. 도심에 위치한 사찰이란 점을 감안하면 작은 사찰이 아닐 수도 있지만, 사찰과 경계를 같이 하고 있는 가정집들을 보면서 저 곳을 포함하고 있으면 좀 더 좋을텐데하는 생각에 아쉬운 생각이 많이 들었다. 또한편 옥천암 백의관음께서 이교도들에게 수모를 당한 사실을 알았을 때에는 자비의 마음으로 참는 것 만이 능사인가하는 회의감과 자괴감 마저 들었다.



옥천암(玉泉庵)은 1868년 조선의 제26대 임금 고종의 아내였던 명성왕후의 명으로 정관(淨觀)스님이 관음전을 지어 천일기도를 올렸던 것이 그 시작이다. 하지만 옥천암을 유명하게 만든 것은 옥천암보다 그 역사가 오래된 거대한 바위에 새겨진 마애불이다. 

공식명칭이 옥천암 마애보살좌상인 이 불상은 ‘백불(白佛)’또는 ‘해수관음(海水觀音)’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5미터 높이의 관세음보살을 누가 언제 조성했는지는 알 수 없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세울 때 이곳에서 기도를 올렸고, 대원군의 부인이자 고종의 어머니인 민씨(閔氏)가 고종의 복을 비는 치성을 드리며 불상에 분을 바르기 시작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기록이 아닌 구전이다. 비교적 둥근 얼굴은 눈이 가늘고 입이 작게 표현되어 고려시대 불상의 일반적인 특징을 보여준다고 하여 고려말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옥천암 마애불에는 재미나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조선 명종 때 김수동이란 사내가 중매로 해수라는 처녀를 아내로 맞아들였는데, 시어머니의 구박이 어찌나 심했던지 얼마 후 시댁에서 쫓겨나 결국에는 굶어죽기에 이르렀다. 죽음을 예감한 그녀는 자신의 화병을 식혀줄 수 있도록 물이 흐르는 냇가에 묻어주기를 바랐고, 김수동은 소원대로 그녀를 바위 아래 강바닥에 묻어주었다. 그후 김수동은 그 바위에 자기 부인의 모습을 새겨넣었고, 사람들은 이것을 가리켜 해수관음의 형상이라 부르며 신성시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옥천암 안내문


이 불상은 옥천암 보도각 안 바위에 새겨진 마애좌상이다. '불암' 또는'보도각 백불'로 일컫지만, 조선말기부터 통칭하여 '백의관음상'으로 부르고 있다. 조선 태조 이성계가 한양에 도읍을 정할 때, 이 존상 앞에서 기원했으며 흥선대원군의 부인도 아들 고종을 위해서 기도했다는 말이 전해 내려오는 서울의 이름난 불교 존상이다.

독립된 거대한 불암바위 앞면에 5미터의 장대한 마애상을 새겼다. 그리고 이 위에 팔작지붕의 전실형 건물을 세워 마애상을 보호하고 있다. 존상은 머리에 고려 초기부터 유행하던 높은 보관을 쓰고 있는데, 뿔처럼 생긴 관대에는 시대적 특징을 보여주는 화려한 꽃무늬 수술 장식이 표현되어 있다. 존상의 얼굴은 타원형인데 양감이 비교적 부드럽고 눈·코·입이 단아하다. 신체는 건장하면서도 유연한 편이며 얼굴은 단정하면서도 부드러운 인상이어서 고려 12~13세기 마애불상 양식을 대표하는 걸작으로 평가된다.​

옥천암에는 백의관음을 모시고 있는 보도각 이외에도 극락전과 삼성각이 있다. 삼성각의 경우에는 다른 사찰과 다소 다른 점이 있다. 독성, 칠성, 산신을 모시고 있는 것은 같지만, 옥천암의 산신은 뒤의 바위에 부조되어 있어, 적멸보궁마냥 유리창을 통해 전각에서 기도드릴 수 있게 되어있다.


옥천암 주불전이 극락전.



삼성각




옥천암에는 또다른 재미난 풍경이 있다. 옥천암에는 일주문은 있는데 천왕문은 없다. 대신 극락전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이렇게 사천왕님을 모시고(?) 있다. 


극락전 앞에 있는 석탑


옥천암 자료를 찾아보다가 분괴할 수 밖에 없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얼마전 여수 '향일암' 화재 관련 자료에서도 봤던 비슷한 내용이었다. 불제자들은 부처님의 말씀에 따라 더불어 살고자 하는 노력을 매진한다. 어떠한 부당한 공격에도 그냥 묵묵하게 참으면서 포용하고자 노력한다. 그런데 여전히 그들의 끊임없는 치졸한 공격에 계속 참아야만 하는 것인지 의문이 생긴다. 

1989년 5월11일 옥천암에 괴한들이 침입했다. 부처님 오신 날을 하루 앞둔 새벽이었다. 바람이 거세고 비가 사납게 내렸다. 괴한들은 하얀 부처 얼굴에 붉은 페인트로 ‘개++’ ‘돼지’ 등이라고 썼다. 석탑 3기와 석등 2기를 파손하고 사찰문과 돌계단에도 ‘개집’ ‘미친+’이라고 썼다. 이교도들의 만행이었다. 아침이 올 때까지 바람은 계곡을 훑으며 울었고 빗발이 옥천암 주변을 무섭게 두드렸다.

날이 밝아 부처 얼굴을 본 신도들은 몸을 떨었다. 보살들은 울음을 터뜨렸다. 하얀 살결은 더럽혀지고, 부처의 얼굴을 차마 볼 수 없었다. 옥천암 신도 이복희 보살은 누구보다 슬피 울었다. 1965년부터 옥천암 부처님을 뵈었지만 이럴 수는 없었다. 다행히 괴한들은 마애불에 망치질은 하지 않았다. 신도들은 페인트를 지우며 용서를 빌었다. 하얀 살갗을 찾을 때까지 옥천암에는 슬픔이 그득했다.​

(출처 : 법보신문, "6. 서울 홍은동 옥천암")


 향일암 누가 불태웠나? BTN

http://www.btn.co.kr/btntv/detail.asp?ls_StSbCode=CATPR_08&PID=P1031&DPID=56892​


향일암 화재


불은 2009년 12월 20일 0시 24분경 발화가 시작되었고 종무소 김만재 사무국장이 대웅전에서 불길이 치솟는 것을 보고 119에 신고했다. 여수소방서에 화재신고 접수 후 30여분만에 소방차가 현장에 도착했고 새벽 1시경 부터는 향일암 내 저수조 물을 이용해 화재진압에 나섰지만 대웅전은 화마에 휩싸인 뒤였다. 불은 3시간 뒤인 3시 30분 경 완전 진화되었지만, 이미 대웅전을 비롯한 종무소 종각 등 3개동을 완전히 집어 삼켰다.

향일암측에 따르면 발화지점으로 추정되는 대웅전에는 화재발생 4시간 전쯤인 저녁 8시경 16명의 신도들이 대웅전 기도를 끝마쳤고 당시 대웅전에는 아무도 없었다고 하며, 11시까지도 별다른 이상 징후는 없었다고 한다. 각종 전기시설 또한 새것으로 교체를 한지 얼마되지 않아 누전의 가능성은 더욱 없었다. 가장 큰 가능성은 이교도에 의한 방화였고 그 중심에 정신병자와 같은 한 여자가 있었다.

기독교 신자인 정모씨(당시 43세, 여)는 2009년 4월 알루미늄 파이프를 옷 속에 숨겨와 새벽 4시께 대웅전 안에 모셔져 있는 인등 부처님과 인등 유리문, 삼존불 좌대 장식, 황금 단청, 불전함 유리 등을 마구 깨 5000만원 상당의 재산피해를 입혔고, 그 이전에도 “우상을 숭배하면 안 된다”며 향일암 경내에서 징을 치며 2차례 소란을 피운 적이 있었다.

기독교인 정모씨에게 상당한 의심은 갔지만, 당시 향일암 내에 CCTV도 없었고, 자신이 주장하는 알리바이가 있어 결국은 미제사건으로 남게 되엇다.

3년만에 향일암의 외형은 복원되었지만 그들의 만행은 향일암을 넘어 전국곳곳에서 아직도 자행되고 있다. 우리는 계속 참고 인내하면서 그들을 포용해야만 하는 것인가? 스스로 지독하게도 우상을 숭배하고 있으면서도, 우상숭배를 전혀 하지 않는 우리에게는 우상숭배를 하지말라고 하는 이율배반적인 행동에 역겨움을 넘어 분노가 느껴지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