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사진/서울

젊은 사찰, 진관사

산풀내음 2019. 10. 3. 18:00


해탈문을 지나면 왼편에 아미타마애불이 모셔져 있다.


진관사의 첫인상은 '젊고 단아하다'였다. 일주문과 해탈문을 지나 조금 더 올라가면 왼편에 연지원이라고 하는 곳이 있다. 그곳은 간단하게 휴식을 취하며 차 한잔을 즐길 수 있는 장소인데 사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러한 느낌이 아니라 대학가에 있는 젊은 카페의 느낌이라고나 할까? 잠깐 내가 사찰을 찾은 것인지 아니면 젊은이 가득한 대학가를 찾은 것인지 착각에 빠지게 된다.



연지원을 지나 조금 올라오면 진관사의 사천문의 역할을 하는 홍제루가 나온다. 이곳을 들어서면 정면에 대웅전이 보인다. 나는 또한번 더 놀란다. 수많은 사찰을 돌아다녀 보았지만 사찰 앞마당 전체가 파란 잔디로 덮혀 있는 곳은 처음이다. 잘 관리가 된 정원 뿐 만 아니라 전각 하나하나가 모두 단아한 모습이다. 우리나라 대표적인 비구니 사찰인 운문사를 처음 갔을 때 받은 느낌 그대로였다. 이곳 역시 비구니 사찰인 점을 생각하면 스님이라는 신분을 떠나서 여성의 남성과는 다른 감수성을 느낄 수 있었다.




이러한 여성의 따스함과 섬세함은 사찰 어디에서도 쉽게 느낄 수 있지만, 또 다른 숨겨진 장소가 하나 더 있다. 일주문과 해탈문을 지나 바로 왼편에 아미타부처님이 모셔져 있고 이곳을 지나 조금더 올라가면 연지원에 이르기 전에 왼편으로 가는 길이 있다. 이 길을 따라 조금 가면 '룸비니 동산'이라는 곳이 나오는데 바로 이곳이다. 진관사의 여러 전각 대신 소나무가 있는 곳이라고 생각하면 될 듯하다. 순간 이 넓은 장소를 어쩌면 이렇게 단정하게 관리를 하셨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또한 수행이라 생각하면서?



조계사의 말사인 진관사(津寬寺)는 신라 진덕여왕( ~654) 당시 신혈사(神穴寺)라는 이름으로 창건된 작은 사찰이었다. 일설에 따르면 원효대사(617~686)께서 창건하였다고 한다. 신혈사가 진관사로 이름이 바뀐 것은 고려 8대 왕인 현종이 자신의 목숨을 지켜준 진관(津寬)스님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왕이 되어 크게 사찰을 중창하고 사찰명도 신혈사에서 진관사로 바꾼 것에 기인한다.

당시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 다음과 같다. 고려 6대 왕인 성종이 병사하자 5대왕 경종의 아들인 목종이 7대 왕으로 즉위한다. 18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즉위한 목종은 997년부터 1009년까지 재위하는 동안 997년부터 999년까지는 어머니인 헌애왕후(목종이 왕위에 오르니 헌애왕후는 정사를 돌보면서 천추단에 거처하였다고 하여「천추태후」라 불리었다.)가 섭정하였고 999년부터 1009년 퇴위할 때까지 헌애왕후의 외척이자 치정남인 김치양(金致陽)이 실권을 맡았다.

한편 경종 사후 김치양과 경종의 왕후인 헌애왕후(천추태후)는 부적절한 관계를 이어왔고 이들 사이에 추문은 끊이질 않았기에 성종도 김치양을 처형하려 하였으나 대신 멀리 유배를 보내는 것으로 하였다. 성종 사후 김치양은 정계에 다시 복귀하였고 1003년경에는 천추태후와의 사이에서 아들까지 낳았다. 이런 가운데 당시 목종에게는 아들이 없었고, 목종의 다음 순위로는 고려 태조의 왕자인 왕욱과 태조의 손녀이자 경종의 왕비였던 황보씨 사이에서 난 대랑원군(大良院君) 왕순(王詢)이 왕위 계승자로 정해져 있었다.


참고) 삼국시대 신라에서 왕족과 귀족층을 중심으로 왕권강화와 골품제 유지를 위해 성행하였던 근친혼은 고려초기 왕실내에서도 성행하여 이복남매 간의 결혼까지도 행해졌다. 이러한 근친혼은 고려말에 사라지기 시작하여 조선 당시에는 엄격하게 규제되었다.

따라서, 천추태후와 김치양은 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을 후계자로 만들기 위하여 대랑원군을 제거하고자 했다. 먼저 목종에게 참소하여 숭경사(崇慶寺)에 가두고 죽일 틈을 엿보았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다시 삼각산 신혈사로 옮기도록 하였다. 당시 신혈사는 진관(津寬)이 혼자서 수도하는 곳이었기 때문에 살해하기 쉬울 것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목종이 천추태후의 음모를 눈치채고 서경(西京) 도순검사(都巡檢使) 강조(康兆)에게 대량원군의 호위를 명하였며, 신혈사의 주지인 진관스님도 위험을 무릅쓰고 현종을 보호하였던 덕분에 간신히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다. 천추태후가 어찌나 집요하게 현종을 암살하려 했는지 진관스님이 본존불을 안치한 수미단 아래에 굴을 파서 현종을 숨겨놓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 후 1009년에 강조가 정변을 일으켜 목종을 폐위하고 대량원군 왕순을 왕위에 올리니 이가 고려 8대왕 현종이다. 강조는 김치양 부자를 죽이고 천추태후와 목종은 귀양을 보냈다. 목종과 천추태후는 귀법사(歸法寺)를 거쳐 충주(忠州)로 추방되었는데, 강조는 불안을 느껴 모자(母子)가 적성현(積城縣)에 이르렀을 때 사람을 보내어 목종을 살해했으며, 천추태후는 황주(黃州)로 도망가 거기에서 여생을 마쳤다.


강조의 정변으로 왕이 된 현종은 즉위 이듬 해에 자신의 목숨을 구해 주었던 승려 진관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로 신혈사를 큰 절로 증축해 주었고 진관의 이름을 따서 절 이름도 진관사라고 붙인 것이다. 그리고 이 일대의 지명도 이 이름을 따 진관동이라 하였다.

고려시대에는 왕실 사찰로 크게 융성했고 숭유억불의 조선시대에도 국가의 수륙재를 봉행하는 사찰로 그 위상을 공고히 했다. 1463년(세조 9년) 화재로 소실된 것을 1470년(성종 1) 벽운(碧雲)이 중건하였으며, 1854년(철종 5)과 1858년에 중수하였다. 이후에도 진관사는 동쪽의 불암사, 남쪽의 삼막사, 북쪽의 승가사와 함께 한양 근교 4대 사찰 중에 하나로 서쪽을 대표하였다.

하지만, 진관사도 한국전쟁 당시 화마를 비켜날 수는 없었다.  나한전과 독성각, 그리고 칠성각 3동만을 남기고 모두 소실되었던 것이다. 이런 참담한 상황에서 1962년 3월 진관스님(眞寬, 비구니)께서 진관사 주지로 오셨고, 1964년부터 본격적으로 당우를 차례로 재건하여, 현재에는 대웅전을 비롯한 명부전, 나한전, 독성전(獨聖殿), 칠성각, 홍제루(弘濟樓), 종각(鐘閣), 일주문, 선원(禪院), 대방(大房) 등을 갖추었으며, 비구니 수도도량으로 이용하고 있다. 진관사 호주로 계셨던 스님은 2016년 7월 3일, 세수 89세 법납 68세로 원적하셨다.

진관사는 독립운동의 산실이기도 하다. 2009년, 진관사는 칠성각 보수 공사에 착수했다. 그런데 건물을 뜯어보니 그곳에서 오래된 태극기와 1919년, 3.1만세운동이 벌어진 해의 6월부터 12월까지 발행된 상해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 상해에서 신채호 선생이 창간한 ‘신대한신문’, 그리고 항일지하신문인 ‘조선독립신문’, ‘자유신종보’ 등 수십 점의 항일 신문들이 발견되었다. 조사 결과, 태극기는 3.1만세운동 즈음에 제작되어 실제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되었다. 발견된 신문들 역시 등록문화재로 지정, 독립 운동 당시의 중요한 사료로 보존되고 있다.


백초월 스님



태극기와 당시 신문을 칠성각에 보관한 스님은 초월 스님이다. 당시 불교계의 중요한 독립운동가 중 한 분이었던 그는 일본 경찰들의 수사가 좁혀오자 태극기와 신문을 급하게 이곳 칠성각에 숨긴 것으로 전해진다. 스님은 독립운동을 통해 자금과 인재를 상해 임시정부로 보내는 일을 주로 했는데 수 차례 체포와 고문 속에서도 끝까지 독립운동을 고수하다 1944년, 해방을 한 해 앞둔 시기에 청주교도소에서 옥사하고 말았다. 초월 스님은 1986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되었고 2014년 6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지정되었다. 진관사 초입의 길 이름도 ‘백초월길’이다. 

(출처 : 매일경제, "국립공원 사찰 여행-우리 생활 속 사찰 ‘삼각산 진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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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관사의 대표적인 가람들을 잠깐 살펴보면 대문 격인 홍제루를 들어서면 정면에 대웅전이 있고 그 오른쪽(대웅전을 바라보는 입장에서)으로 차례로 명부전, 독성전, 칠성각이 있고, 오른편으로 돌면 나한전과 적묵당이 있다. 


대웅전에는 현세불이신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제화갈라보살(과거불), 미륵보살(미래불)의 삼세불(三世佛)을 모시고 있다. 삼세불 뒤로는 삼신불을 묘사한 탱화가 있다. 법신불인 비로자나불, 보신불인 노사나불, 화신불인 석가모니불이시다.

대웅전을 바라보고 바로 좌측에는 고 육역수 영부인께서 식수하신 보리수가 있다.

대웅전 바라보고 오른편에는 명부전이 있다.


나한은 부처님의 깨달은 제자들을 말하며 ‘공양을 받을 자격이 있는 분’ 이라 하여 응공應供이라고도 한다. 독성전, 칠성각과 더불어 가장 오래된 나한전에는 소조 석가삼존상(서울시 유형문화재 제143호), 소조 16나한상(서울시 유형문화재 제144호), 영산회상도(서울시 유형문화재 제145호)등이 봉안되어 있다.(출처 : 진관사 홈페이지)​

16나라한은 석가모니의 핵심 제자들로, 빈두로파라타존자, 카나카밧사, 카나카브하라드바아쟈, 수빈다, 나쿨라, 브하드라, 카리카, 바즈라푸트라, 지바카, 판타카, 라후라, 나가세나, 앙가쟈, 바라나밧시, 아리타, 쿠다판타카 등이다.


독성(獨聖)은 ‘홀로 깨달은 분’이란 뜻으로 주로 나반존자(那般尊者)라고 한다. 나반존자는 16아라한의 한 분이신 빈두로파라타존자를 말하며 신통이 뛰어나서 부처님이 열반하신 후에도 세상을 제도하면서 중생의 복전(福田)이 되는 분이다. 1907년에 세워진 독성전에는 독성상(서울시 문화재자료 제11호), 독성도(서울시 문화재자료 제12호)와 함께 산신도(서울시 유형문화재 제149호)도 함께 봉안되어 있다. (출처 : 진관사 홈페이지)

독성각


칠성각은 원래 북두칠성을 상징하는 치성광여래와 빛나는 지혜로 중생을 가르치는 일광보살, 달처럼 청정한 덕으로 중생을 교화하는 월광보살, 칠성대군(민간 신앙으로, 불교에 흡수된 칠성신앙의 상징. 칠성신앙은 인간의 무병장수를 기원한다)을 모신 곳이다. 석조여래좌상과 칠성도가 봉안되어 있는 이곳에는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독립운동과 관련된 중요한 사실이 담겨있다.



칠성각


보현보살님을 봉안하고 있는 향적당은 대웅전 정면에서 왼편에 그리고 휴게소 역할을 하고 있는 연지원 뒤편에 위치하고 있다. 진관사는 예로부터 사찰음식, 예례음식에 탁월한 사찰로 인정받았었다. 된장, 고추장, 간장 등을 전통 방식으로 만들고 있으며, 이외에도 제철 나물, 채소 등을 이용, 효소, 부각, 장아찌, 말린 나물 등 저장 음식을 만들어 나누고 있다. 진관사의 사찰음식은 바로 이곳 향적당에서 특별한 행사 때 체험할 수 있는데, 한국인은 물론 외국인들도 찾아오는 곳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