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사진/강원

관음보살님을 찾아 낙산사로 ....

산풀내음 2018. 11. 21. 21:12

2018년을 시작하면서 올 한해 동안 할 것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다. 여러가지가 있었지만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5대 적멸보궁과 4대 관음기도도량을 순례하는 것이었다. 남해 보리암을 시작으로 여수 향일암, 강화 보문사 그리고 양양 낙산사(홍련암)를 차례로 방문하여 기도를 올리면서 4대 관음기도도량을 먼저 순례하였다. 관음기도도량에서의 기도를 올리고 다음으로 정선 정암사, 양산 통도사, 평창 상원사, 영월 법흥사 그리고 설악산 봉정암을 차례로 순례하면서 부처님께 기도를 올렸다. 

그런데 한 가지 마음 속에 아쉬움이 남아 있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낙산사였다. 관세음보살님을 만나뵙기 위해 찾아갔지만 그 전주에 보문사에서 기도 중 무릎이 까져 도저히 관세음보살님께 108배를 올릴 수가 없어 그냥 3배만 올리고 돌아온 것이 못내 아쉬웠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아들을 만나기 위해 포항으로 가는 길에 낙산사에 들려 정성을 다해 기도를 올렸다. 미세먼지로 다소 뿌연 날씨였지만 금요일에 찾은 낙산사는 방문객이 적어 조용히 기도를 올리기에는 더없이 좋았다.


남해의 보리암, 강화도 보문사와 함께 우리나라 3대 관음성지로 불리우는 낙산사(洛山寺)​는 신라 문무왕 12년(672년)에 의상 대사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의상은 ‘관음보살’의 진신이 이 해변의 굴 안에 머문다는 말을 듣고 굴(관세음보살을 친견한 곳이라 하여 관음굴(觀音窟)이라 한다) 속에 들어가 예불하던 중 관음보살이 수정으로 만든 염주를 주면서 절을 지을 곳을 알려 주어 이곳에 사찰을 창건하고 ‘낙산사’라 하였다 한다. 훗날 의상대사가 수도한 절벽 위에 정자를 세워 의상대(義湘臺)라 불렀고, 관음보살이 바다에서 붉은 연꽃을 타고 솟아오른 자리 옆에 절을 지어 홍련암(紅蓮庵)이라 했다.



* 관세음보살은 어떤 분이신가?


과거 아승지겁(阿僧祗劫,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수량) 전 옛날에 남천축 마열파타국(摩涅婆咤國)에 장나(長那)라는 장자와 마나사라(摩那斯羅)라는 부인이 살았는데, 슬하에 자식이 없어 천신에게 기도한 후 아들 둘을 얻었다. 이에 장자는 바라문을 불러 관상을 보이고 장래를 점치니 어려서 부모를 여읠 운명이라고 하여 조리(早離)와 속리(速離)라는 이름을 지었다. 그러던 중 형인 조리가 일곱 살 동생인 속리가 다섯살이 되던 해 그 어머니가 병으로 죽게 되었다. 이에 장자는 어린 두 아들을 위해 후처를 맞이했다.

그러던 어느 해 가뭄으로 흉년이 들게 되자, 장자는 식량을 구하러 단나라산(檀那羅山)에 가고 없었다. 그 사이에 계모는 두 아들에게 좋은 섬을 유람 하자고 꼬여 무인절도에 데려가 남겨놓고 와버렸다. 섬에 남게 된 조리와 속리는 굶주림으로 죽어가며 백가지의 원을 세웠다. “원컨대 보살도를 닦아 시방국토의 일체중생을 모두 이익하게 하겠습니다.”라는 원을 세운 뒤 명을 거두었다.

장자가 돌아와 두 아들이 고도(孤島)에 버려진 것을 알고 찾아 갔으나 겨우 백골의 무더기만을 발견했다. 이에 장자도 슬피 울며 오백 가지의 원을 세우기를 “널리 모든 악한 중생을 제도하여 빨리 불도(佛道)를 이루게 하겠으며, 항상 사바세계에 머물면서 부처님의 법을 설하여 중생을 교화 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장나장자는 석가모니의 전신(前身)이며, 마나라사는 아미타여래가 되었고 형인 조리는 관세음보살이 되었고 아우인 속리는 대세지보살이 되었으며, 단나라산은 바로 영축산이며 그 무인도는 보타낙가산이다.

그리고 또 이어서 “이 관음보살은 과거무량겁전에 이미 불도를 이루어 이름이 정법명여래이시니 너희들이 항상 공양하고 그 이름을 일컬으면 무량한 죄를 멸하고 많은 복을 얻어서 아미타불국토에 왕생하리라.” 라고 설하셨다.

이상은 「관세음보살왕생정토본연경」의 설화로 관세음보살이 영산회상에서 자신의 본연을 말씀하신 연기담이다. 『속장경(續藏經)』 제87권에 수록되어져 있는 내용이다.​

(출처 : 낙산사 홈페이지)​​


* 낙산사 창건설화


의상은 중국 당나라에서 불교를 공부하고 문무왕 10년(670년) 신라로 돌아왔다. 2년이 지난 어느 날 신라에도 관세음보살 진신이 머물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관세음보살님을 친견하고자 이곳 낙산으로 왔다. 7일 동안 기도를 드린 후 자신이 앉아 기도드렸던 받침을 물 위에 띄우자 부처님의 세계를 지키는 천룡팔부의 시종이 나타나 의상을 굴속으로 이끌었다. 굴 속에 들어간 의상스님은 관세음보살님을 친견했다. 그리고 스님은 관세음보살님이 주시는 수정염주(水精念珠)를 가지고 굴 밖으로 나와 다시 7일 동안 정진에 들어갔다.

다시 스님은 천룡팔부의 시종의 인도를 받아 굴속으로 들어가 관세음보살님을 친견했다. 관세음보살님은 스님이 수행하시던 산 꼭대기에는 대나무 한 쌍이 솟아날 것이니 그곳에 불전을 건립하라고 한다. 스님은 그 자리에 금당(金堂)을 짓고 불상을 모시니 부처님 상호는 마치 하늘이 내려온 것 같이 온화했다. 불전을 모시자 대나무는 곧 사라졌다. 의상스님은 관세음보살님의 진신이 그 곳에 머물다 간 것임을 확연히 깨달았다. 그래서 의상스님은 사찰 이름을 ‘낙산사’로 정하고 자신이 받은 수정염주 2개를 불전에 모셨다. ​

일설에는 의상 대사는 바닷가 관음굴을 참배할 때 파랑새를 만났는데 새가 석굴 속으로 포로롱 날아들어가 자취를 감추자 이상히 여기고 굴 앞에서 7일 밤낮 기도했다. 7일간의 지극한 기도 후 별안간 바다 위에 홍련이 솟고 그 가운데에 관세음보살이 현신하여 의상대사는 그 자리에 암자를 짓고 이를 홍련암(紅蓮庵)이라고 했는데 이곳이 낙산사의 모태사찰이 됐다고 한다.


낙산사 홍련암 벽에 그려져 있는 그림으로 의상대사가 관세음보살을 친견하는 모습


* 낙산사와 원효대사


원효대사의 관세음보살 친견 이야기는 여러 곳에서 나온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자재암 창건설화와 관련된 이야기일 것(참고 : http://blog.daum.net/gmania65/1602)이고, 이곳 낙산사/홍련암과 관련하여서도 관세음보살 친견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 오고 있다.

원효대사는 의상법사가 관음보살을 친견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낙산을 찾아가다가 논에서 벼를 베는 흰옷 입은 여인을 만나 벼를 달라고 요구하고, 물가에서 서답(생리대)을 빠는 아낙에게는 물을 달라고 한다. 물가의 아낙이 더러운 물을 떠 주자, 원효는 물을 버리고 다시 개울물을 떠서 마신다. 그때 소나무 위의 파랑새 한 마리가 ‘잘난 스님은 그만하시게’라고 꾸짖고 홀연히 사라졌는데, 그 밑에 신발 한 짝이 남았다. 대사가 낙산사에 도착해 보니 관음보살상 앞에 다른 한 짝이 있음에 앞서 만난 여인과 파랑새가 관음보살의 진신임을 깨달았다. 다시 진신을 만나기 위해 굴로 들어가려는데 풍랑이 크게 일어 발길을 막았다.

자재암에서의 관음보살 친견과는 달리 이 설화에서는 원효대사가 관음보살에게 봉변을 당하는 것으로 묘사가 되어 있다.

'왜일까?'하는 궁금정을 풀기 위해 이것저것을 뒤지다 보니 아래와 같은 해석을 한 것이 있어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신라 불교의 쌍벽을 이루고 있던 의상과 원효, 왜 그들의 능력은 차이가 나는 것으로 그려졌을까? 의상은 진골 출신이었고 원효는 육두품출신인데다 의상은 엄격성, 규범성을 강조하며 호국신앙을 내세운 반면 원효는 민중과 함께 하며 '모든 것이 마음에 달렸다'는 자율성을 강조하였다.​


통일 전쟁을 치르고 난 신라는 새로운 국가체계를 갖출 필요가 있었고 그에 맞는 사상은 원효의 것보다는 의상의 것이 더 필요했던 것이다. 그야말로 의상의 '코드'가 더 맞았던 것이다. 그러나 대중들은 엄격한 규율을 강조하는 의상보다 중생과 함께 하는 원효의 이념을 더 선호했을 것이다. 그래서 낙산사의 설화에서 무리를 해가며 원효는 '엉뚱한' 행동을 하는 중으로 의상은 법력이 뛰어난 '반듯한' 승려로 그리고 있다."      (출처 : OhmyNews, "낙산사, 원효 대신 의상을 택한 까닭?")

낙산사는 수난을 많았던 사찰이다. 이는 마치 캘리포니아 지역에 대형산불이 많은 것처럼 낙산사가 있는 지역의 독특한 지세와 기후 상황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이다. 특히 겨울에 산이 많은 강원도 지역은 나뭇잎이 수십 센티 이상의 깊이까지 쌓이고 바닷가 해풍에 바싹 마르기까지 하며 거기에다 강한 태양이 작은 불씨라도 만들어 내면 큰 산불로 변하기 때문이다. 

고려 초기에 난 큰 산불에 관음보살 등 불상을 모신 건물 2개만 무사한 채 전각들이 모두 불타고 말았다. 그러다 몽골이 침략했을 때 이 건물을 포함한 절의 모든 건물이 소실됐다. 그 후 낙산사는 다시 지어졌으나 임진왜란 때 또 폐허가 됐고, 1900년대 초에 복구되지만 한국전쟁 때 또 다시 불에 타서 사라지고 말았다. 이후 1953년 사찰의 중심 건물인 원통보전과 법종각 등이 복구됐고, 1970년대에 들어 전체적으로 복원되면서 낙산사의 명물인 해수관음상도 만들어졌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2005년 고성과 양양지역을 휩쓴 대화재로 인해 낙산사는 또 한 번 잿더미로 변해 버렸다. 보물 479로 지정되었던 낙산사 동종도 이 불길에 녹아 사라졌고 화강암으로 만든 해수관음상과 몇 개의 유물만 남았다. 현재는 화재 당시 타버린 주변 산림의 복원을 위해 30년 생 소나무 1300여 그루를 옮겨 심어 예전의 아름다움을 재현했지만, 안타깝게도 여러 번의 화재 흔적은 곳곳에서 찾을 수 있다. (출처 : 사이언스올, "[지도 없이 떠나는 과학문화여행 ①] 천년 고찰 동해안 낙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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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산사는 낙산비치호텔 옆으로 들어가는 방법(후문)과 7번 국도와 바로 이어지는 정문으로 들어가는 방법, 두가지가 있다. 정문으로 들어서면 일주문과 홍예문이 차례로 우리를 반긴다. 우리나라 최고의 관음성지라 할 수 있는 낙산사는 그 전각에서도 잘 알 수 있다. 일주문, 홍예문과 사천왕문 등을 차례로 지나면 낙산사의 주불전인 원통보전이 나온다. 원통보전은 관세음보살을 주불로 모시는 곳으로 원통전, 관음전이라고도 한다. 원통보전 이외에도 낙산사에는 관세음보살을 모시는 전각이 또 있다. 사천왕문 오른 편에 있는 보타전과 해수관음상 아래에 있는 관음전이 바로 그곳이다. 언급한 바와 같이 관음전 위에는 국내 최대 규모라 할 수 있는 해수관음상이 있으며 사내암자인 홍련암 역시 의상 대사가 관음보살을 만나고 지었다고 전해지는 곳이다.

낙산사 일주문

일주문 안쪽에 그려진 백의관세음보살

홍예문. 낙산사 일주문을 지나 원통보전 방향으로 올라가다가 보면 돌로 만든 문이 나온다. 이 문은 조선 세조 13년인 1467년에 세조가 낙산사에 행차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절 입구에 세운 무지개 모양의 돌문이다. 세조가 조성할 당시 강원도에는 26개의 고을이 있었는데, 세조의 뜻에 따라 각 고을의 수령이 석재를 하나씩 내어 26개의 화강석으로 홍예문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 홍예문은 전각 없이 세웠던 것을, 1963년에 돌문 위에 정면 세 칸, 측면 한 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을 얹은 문루(門樓)을 세워 아름다움을 더했다. 문루는 2005년 4월에 발생한 산불로 소실되었다가 2007년에 복원됐다.

원통보전 앞에 세워진 7층 석탑은 조선시대 세조 때 세워졌다고 추정되고 있다. 의상 대사가 3층으로 세운 탑을 세조의 낙산사 중건 명을 받은 학열 스님이 다시 쌓은 것으로 알려진다.

원통보전

낙산사의 중심 법당은 관음보살을 모시는 원통보전(圓通寶殿)이다. 원통보전은 2005년 불탔지만 다행스럽게 안에 모셔졌던 건칠관음보살좌상(洛山寺乾漆觀音菩薩坐像, 보물 1362호)과 후불탱화는 다른 곳으로 옮겨져 무사할 수 있었다. 건칠관음보살좌상은 조선 세조 13년(1467년)에 왕명으로 낙산사를 중건하며 함께 만든 관음보살상이다.

해수관음상. 1977년 완성된 높이 16m의 관음상이다. 

해수관음상 바로 아래에 위치한 관음전으로 안에는 별도의 관세음보살이 모셔져 있는 것이 아니라 적멸보궁과 같이 안에서 해수관음상을 보면서 기도할 수 있도록 마련된 전각이다.

공중사리탑. 1692년 석겸 스님 등이 큰뜻을 세우고 조성한 사리탑이다. 숙종 9년인 1683년에 홍련암 불상에 금칠을 다시 할 때 주변에 상서로운 기운이 가득하더니 궁중에서 사리가 탁상 위로 떨어져 이를 봉안하기 위해 세웠다고 한다.

보타전. 보타전 역시 관세음보살을 모신 법당이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천수관음(千手觀音), 성관음(聖觀音), 십일면관음(十一面觀音), 여의륜관음(如意輪觀音), 마두관음(馬頭觀音), 준제관음(准堤觀音), 불공견색관음 등 7관음상과 32응신상, 천오백관음상이 봉안되어 있다. 관음신앙의 성지답게 그야말로 모든 관음상이 봉안된 셈이다. 이렇듯 많은 관음상을 조성한 것은 우리 민족의 구제와 해탈을 기원하는 뜻에서라고 한다.


1500관음상 한 분 한 분의 천수천안과 32응신상을 곱하면 그 수가 5천만 정도인데, 그것은 곧 5천만 우리 민족의 인구수와 일치한다. 곧 우리 5천만 민족의 구원과 해탈을 기원하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관음상의 재질은 모두 목조로서 백두산에서 자라는 홍송(紅松)을 사용했다. ​​

의상대. 의상 대사가 수행을 하던 장소라고 전해지며, 18세기까지는 정자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지만, 이후 폐허가 되었다가 1925년에 다시 정자를 세웠다.

홍련암. 의상 대사가 관음보살을 만나고 지었다고 전해지는 곳으로 바닷가의 암석굴 위에 자리잡고 있다. 이 암석굴은 관세음보살님을 친견한 곳이기에 관음굴(觀音窟)라고 한다. 고려때에 이미 중국 송나라에까지 관음기도도량으로 널리 알려졌다. 혜진(惠珍)이라는 송나라스님이 고려 헌종 때 낙산사의 관음굴을 친견하기 위해 입국했다는 기록이 있다. 홍련암의 관세음보살은 조선시대에도 깊은 신앙의 대상이 됐다.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의 할아버지는 아들이 없었다. 그래서 이씨로 알려진 할머니와 낙산사 관음굴을 찾아 정성을 다하여 기도를 올린 끝에 이성계의 아버지를 낳았다는 설이 전해진다. 2005년에는 낙산사를 모조리 불태운 화마가 홍련암 앞까지 덮쳤는데 1m 전에서 불길이 갑자기 멈췄다고 한다. 그 무서운 화마 조차도 홍련암은 덮치지 못한 것이다.

홍련암 기도 법당 안에는 작은 구멍이 있어서 이곳을 통해 아래를 볼 수 있다. 이 아래에 의상대사가 관음보살을 친견하기 위해 기도했다고 하는 관음굴이 있다



* 조신의 꿈 이야기

낙산사에는 관세음보살과 관련된 이야기가 많이 전해져 내려 오고 있다. 그중에서도 삼국유사에 나오는 조신의 꿈 이야기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신라 때의 일이다. 세규사(世逵寺)라는 절에서는 강원도 지방에 농장을 관리하는 장사(莊舍)를 두고 있었다. 세규사에서는 그 장사의 관리책임자인 지장(知莊)으로 조신(調信)이라는 스님을 보내었다. 지장으로 부임한 조신은 어느 날 우연한 기회에 그 고을 해수 김흔공(金昕公)의 딸을 보게 되었다. 태수의 딸을 한번 본 후로 조신은 그 아름다운 처녀를 잊을 수가 없었다. 결국. 그는 그 아가씨를 짝사랑하기까지에 이르렀다.

자신의 처지로는 도저히 이룰 수가 없는 사람이었으므로 그는 낙산사(洛山寺)의 관세음보살님을 찾아갔다. 그 처녀와의 사랑이 이루어지기를 남몰래 기원하였다. 그러기를 여러 해, 영험이 많다는 낙산사관세음보살님께 극진히 빌었지만 끝내 그 처녀는 다른 곳으로 시집을 가버리고 말았다.

그토록 기원하며 바랐던 일이 너무 어처구니없이 허물어지고 말았으므로, 젊은 스님조신은 앞이 캄캄하였다. 그 절망감을 견딜 수가 없어서 그는 다시 낙산사로 갔다. 법당으로 들어간 그는 관세음보살을 원망하는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자신의 쓰린 마음은 아랑곳 없이 대비상(大悲像)은 여전히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애절한 소원을 성취시켜 주지 않은 관세음보살이 못내 원망스러웠다.

결국 그는 그 앞에 힘없이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자꾸만 흐르는 눈물을 훔치며 그는 해가 저물도록 울었다. 그러다가 그는 자신도 모르는 새 꾸벅꾸벅 졸았다. 그리고는 꿈나라로 빠져들었다.

방문을 조용히 열고 들어서는 인기척이 있었다. 그 쪽으로 시선을 돌리던 조신은 스스로의 눈물을 의심하리만치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살며시 문을 열고 방안으로 들어온 여인은 바로 태수의 딸 김씨 처녀였기 때문이다. 하얀 이를 드러내고 배시시 웃으면서 여인은 말하였다.

"제가 일찍이 스님을 먼 발치에서 뵈옵고, 마음으로 사랑하여 잠시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하오나, 부모님의 엄하신 말씀을 어길 수가 없어서 마지못해 억지로 다른 사람에게 시집을 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제 한평생 고락을 함께 누리기를 원하고 이렇게 왔습니다."


조신의 기쁨은 이루 형언할 수가 없었다. 자신의 소원이 이루어진 기쁨으로 그는 여인을 와락 끌어안고 방안을 빙빙 춤추듯 맴돌았다. 그들은 그렇게 해서 부부가 되었다.

조신은 승려의 신분을 팽개쳐 버리고 아내와 함께 그의 고향 마을로 돌아갔다. 거기에서 삶의 터전을 잡고 40여년을 살았다. 그동안에 아이를 다섯이나 두었으나 살림은 가난하여 네 쪽의 벽만 앙상하게 남은 집 한 채 뿐이었다. 하루 세끼 나물 죽 쑤어먹기 조차 힘이 들어서 결국 쪽박을 들고 사방으로 걸식하러 다니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어른들과 아이 다섯의 일곱 식구가 정처 없이 이곳저곳으로 서로 이끌고 걸식을 하며 떠돌아다니는 동안, 누덕누덕 기워 입은 옷은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할 지경이었다.

그들의 발걸음이 명주 해현령(溟州 蟹縣嶺)고개를 넘을 매, 마침 열다섯 살 딴 큰 아이가 굶주림에 지쳐 죽고 말았다. 늙은 부부는 통곡하면서 죽은 아이를 길가에 묻었다. 그들은 나머지 네 아이를 이끌고 우곡현(羽曲縣)에 이르러 길가에 초막을 짓고 우선 몸붙일 처소로 삼았다. 엎친데 덮치기로 열살난 딸 아이가 걸식하러 나갔다가 동네 개에게 물려 아픔을 참지 못하고 울부짖으니, 부모로서 차마 볼 수가 없어 그저 눈물만 줄줄 흘릴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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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고 있던 늙은 아내가 눈물을 닦으며 갑자기 남편을 향해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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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처음 당신을 만났을 때에는 나이도 젊고 얼굴도 예뻤습니다. 먹는 것 입는 것을 궁색한 줄 모르고 서로 의지하며 한평생을 살아봤습니다. 천생 연분이라고 할 만큼 우리는 서로를 아끼고 위해 주며 정도 깊고 사랑도 두터웠습니다. 요즘 와서 늙은 몸에 병은 날로 더 심하고, 추위와 굶주림도 날이 갈수록 더해 가며, 이제는 방 한 칸, 장한 뚝배기도 남이 빌려주지 않습니다. 부끄러움도 무릅쓰고 다니기가 태산보다 더 무겁고, 아이들은 추위에 떨며 굶주림에 울고 있으나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습니다.

이 지경에 이르러 부부의 사랑이 무슨 소용이며, 아리따운 용모와 정겨운 웃음이 모두다 풀잎의 이슬과 같을 뿐입니다. 지금에 있어서 당신은 내가 있어서 더 짐이 되고, 나에게는 당신이 있어서 걱정이 더 큽니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지난날의 즐거움이 오늘의 불행을 자초한 것 같습니다.

당신이나 내가 어쩌다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요. 우리가 어린 것들 데리고 고생하는 것보다 차라리 헤어지는 것이 낫겠습니다."

조신이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그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을 듯했다. 그래서 선선히 승락을 하고 각각 두 아이씩 나누어 맡았다.

"나는 친정이 있는 고향으로 갈까 합니다. 당신은 남쪽으로 가도록 하세요."

늙고 병든 거지의 신세가 된 조신은 틀림없이 마지막이 될 아내의 말에 따르기로 하였다. 눈물마저 메마른 아내의 뼈만 앙상한 손을 놓고, 그는 등을 돌려 남쪽을 향해 정처 없이 발걸음을 떼어 옮겼다.

그 순간, 조신은 눈을 번쩍 떴다. 꿈에서 깨어난 것이었다. 꿈속의 아리고 쓰리던 그 여운이 그대로 남아서 그의 마음은 여전히 괴롭고 무거웠다. 누가 켜 놓았는지 조는 듯한 등판불이 안개처럼 뿌연 빛을 발하고, 그 너머로 여전히 미소 짓는 관세음보살의 자비 넘친 얼굴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꿈에서 겪은 괴로움의 여운이 얼음 녹듯 말끔히 사라져 버렸다 그는 이미 인생의 한평생을 꿈속에서 다 경험한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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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처럼 무상하고 허망한 인생인 것을 모르고, 아리땁게 보이는 한 처녀와의 사랑을 맺게 해주지 않았다고 관세음보살님을 원망하며 울었던 조금 전의 자신이 한없이 어리석게 느껴졌다. 그래서 차마 얼굴을 들고 관세음보살님을 우러러 쳐다볼 수가 없었다. 그는 스스로를 부끄러워하며 관세음보살을 향해 참회하는 절을 올렸다.

그는 꿈을 통하여 관세음보살님의 설법을 들은 셈이었다. 출가 사문의 몸으로 잠시 여성에게 넋을 잃고 스스로의 본분을 잊어버린 조신을 불쌍히 여기신 관세음보살님께서 꿈을 통해 인생의 모습을 비쳐 보이셨던 것이다. 그리하여, 조신으로 하여금 출가사문의 본자리로 돌아오게 하였던 것이라고 할 수가 있다.

이튿날 아침, 물에 비친 그의 모습은 수염과 머리가 온통 새하얗게 되어 있었다. 하룻밤 사이에 백발 노인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그는 그 길로 해현(蟹峴)으로 가서 꿈속의 아이를 묻은 곳을 파 보았다. 거기에서 돌미륵(石彌勒)이 나왔다. 그 미륵상을 깨끗이 씻어서 가까운 절에 모셨다.

조신은 그 길로 서울 본사로 돌아가 장사의 직장을 사임하였다. 그리고는 사재를 털어서 정토사(淨土寺)를 세웠다. 그곳에서 세상을 마칠 때까지 정토업(淨土業, 즉 白業)을 부지런히 닦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