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사진/강원

생태숲과 함께 있는 홍천 수타사

산풀내음 2019. 8. 24. 18:00


수타사 원통보전에 모셔져 있는 관세음보살님


생태숲으로 유명한 홍천 공작산의 수타사를 다녀왔다. '공작산', '수타사'. 그 이름 자체가 참 특이하다. 공작산(孔雀山, 887m)의 공작은 꿩과에 속하는 새의 이름인데, 이 이름이 산의 이름이라는 것 자체가 좀 특이했다. 산의 형세가 공작을 닮아서일까하는 마음으로 자료를 찾아보니, 공작산은 정상에서 좌우로 뻗은 능선이 한마리의 공작새가 두 날개를 벌려 비상하는 형국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수타사이라는 사찰명을 처음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머리에 떠오른 것은 수타면이라고 할 때의 수타(手打)였다. 한자를 자세히 보니 手打가 아니라 壽陀였다. 무슨 의미일까하고 그 의미를 찾아보니 '아미타불의 한량없는 수명'을 상징하는 말이라고 한다. 이렇게 깊은 뜻이 있는 사찰명을 '손으로 때리는 것'이라는 의미로 생각했다는 것이 송구한 마음에 머리가 절로 숙여진다.

수타사를 신라 성덕왕 7년(708년)에 원효스님이 춘천 부근의 우적산(牛跡山)​에 '일월사(日月寺)​'라는 이름으로 창건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원효께서는 이보다 앞선 신문왕 6년(686년)에 입적하셨기 때문에 이를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어려움이 있는 듯하다. 우리나라의 수많은 사찰이 원효 또는 의상대사가 창건하였다는 창건설화를 가지고 있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우적산의 일월사는 조선 세조 3년(1457년)에 지금의 공작산 자락으로 옮기면서 '물이 떨어진다'는 의미의 수타사(水墮寺)로 사명이 바뀌었다. 이후 임진왜란으로 사찰은 전소되었고, 40여년만인 인조14년(1636)에 공잠스님에 의해 중건되었다. 수타사(水墮寺)가 지금의 이름인 수타사(壽陀寺)로 바뀐 것은 1811년(순조 11년)때의 일(고종 15년(1878년)에 취운스님께서 사찰명을 현재와 같이 바꾸었다는 이야기도 있다)이라고 한다. 이는 당시 조선말의 시대적 상황에서 아미타부처님께 대한 중생의 강한 열망이 반영된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아미타부처님의 한량없는 수명을 상징하는 수타(壽陀)라는 사찰명과는 달리, 수타사의 주불전은 아미타불을 모시는 무량수전이 아니라, 비로자나불을 모신 대적광전(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7호)이다. 비로자나불 위의 닫집은 열송이의 백련이 잘 조각되어 있으며 봉황, 비천, 황룡으로 장엄되어 있다.


수타사에는 불교예술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두가지가 있다. 그 첫번째가 수타사를 들어서면 만나는 봉황문에 모셔져 있는 사천왕상이다. 수타사의 정문에 해당하며 1674년 법륜대사에 의해 건립되었다. 이곳에는 1676년에 조각승 여담스님이 조성한 사천왕상이 모셔져 있는데 이는 4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수타사를 지켜 온 수호자인 셈이다.




두번 째는 원통보전에 모셔져 있는 관세음보살님이시다. 1992년에 신축된 원통보전에는 1758년에 모셔진 크기 46cm의 관세음보살이 계신다. 원통보전의 크기에 비해서는 너무나도 작은 관세음보살님이시지만 자비의 마음만은 그 어느 곳에 모셔진 관세음보살님보다 더 크실 것이라 생각이 든다.

관세음보살상은 순경(順瓊)과 덕순(德淳)이라는 조각승에 의해 1758년 수타사 옥수암에서 조성되었으며, 2015년에는 관세음보살상을 개금을 하기 전에 이루어진 복장 조사에서 조성발원문 1점을 비롯해 후령통 1점, 주서(朱書) 다라니 18점, 복장 안을 메우는 빈 백지 4점 등이 발견되었다.

이때 발견된 조성발원문 등에 따르면 관세음보살상을 조성한 간절한 목적은 ‘이 보살상을 조성한 공덕으로 모든 중생이 극락의 연지에 왕생해 무량광불을 만나기를 바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1758년 5월 수타사 옥수암에서는 관세음보살상 점안식이 성대하게 개최되었다. 이 관세음보살상을 조성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동참했는데 조성을 주도했던 증명을 비롯한 조각승과 화주 등 소임을 맡았던 스님은 13명이었고, 옥수암에는 10명의 스님이, 수타사에는 84명의 스님들이 수행하고 있었다. 시주자는 스님들과 일반인들로 모두 252명이 참여했고 46cm의 중소형 관세음보살 조성에 모두 359명이 동참했다.

(출처 : 불교신문, [이야기가 있는 조선시대 불상] ⑨ 홍천 수타사 관세음보살상)


대적광전을 마주 보고 있는 흥회루는 설법을 위한 강당이나 수륙재 같은 불교행사를 거행하던 장소로 활용되었는데 여느 사찰처럼 누 아래로 드나드는 것이 아니라 옆으로 돌아가야 한다. 



2005년 5월에 개장한 성보박물관인 보장각에는 월인석보(보물 제745-5호)가 전시되어 있다고 한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고도 깜빡해서 보지는 못했다. 돌아와 자료를 정리하면서 많이 아쉬웠지만 다음 기회를 기약할 수 밖에는 도리가 없다. 

한글로 지은 최초의 불경인 월인석보는 세종이 지은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과 세조가 수양대군 시절 지은 '석보상절'(釋譜詳節)을 합한 것이다. 1970년대 초 복원 공사를 하던 중 월인석보 제17권과 18권이 사천왕상의 복장유물로 발견됐다. ​


수타사 지장전



수타사가 있는 이곳은 '산소길'로도 유명하다. 수타사 산소길은 1코스 소길(수타사∼출렁다리∼수타사), 2코스 신봉길(용담∼신봉), 3코스 굴운길(신봉∼굴운), 4코스 물굽이길(신봉∼노천) 등 총 4개 코스가 있다. 수타사 산소길 하면 대개 1코스를 말하는데 대부분의 사람은 수타사 주차장을 기점으로 삼아 수타사와 공작산 생태숲을 지나 출렁다리와 용담을 거쳐 수타사 주차장으로 다시 돌아온다. 




주차장에서 수타사로 걸어가다보면 숲길 오른편에는 부도밭이 있다. 7기의 부도 중에는 광해군 때인 1611년 태어나 숙종 15년인 1689년 입적한 승려이신 홍우당 부도가 있는데, 이곳에는 그의 다비식 때 나온 네모난 사리 한 알과 둥근 은색 사리 두 알이 봉안되어 있다.




수타사 입구의 공작교를 건너면 왼쪽이 수타사고 오른쪽이 공작산 생태숲이다. 산소실에서 최고의 절경은 귕소를 꼽는다. ‘귕’은 여물통을 일컫는 강원도 사투리로, 통나무를 파서 만든 여물통처럼 생겨서 붙은 이름이다. 소에서 조금 더 가면 나오는 출렁다리가 반환점 역할을 한다. 



출렁다리를 건너 계곡을 따라 수타사로 되돌아온다. 출렁다리에서 조금 가면 귕소로 내려갈 수 있다. 계곡을 따라 조금 더 내려오면 용담에 이른다. 용담은 명주실 한 타래를 풀어 넣어도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었다는 곳으로 이 소의 박쥐굴을 통해 용이 승천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