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사진/강원

동해 해맞이 명소, 정동진의 등명낙가사

산풀내음 2019. 11. 16. 22:32



강릉 괘방산(掛榜山) 중턱에 해돗이 명소로 잘 알려진 등명락가사(燈明洛伽寺)가 있다. 괘방산? 이름이 참 특이하다. 괘방산(掛榜山)은 산줄기의 모양이 과거에 급제하면 합격자의 명단을 붙이던 방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그래서 과거 선비들은 등명낙가사에서 공부를 하다가 새벽에 괘방산에 올라와 바다를 보며 과거 급제를 기원했고, 과거에 급제하면 괘방산에 급제자의 아버지와 아들의 이름을 쓴 커다란 두루마기를 걸어 놓았다고 한다.
양양의 낙산사와 휴휴암과 더불어 동해에 위치한 대표적인 관음기도처인 등명락가사는 신라 선덕여왕 때 자장율사(慈藏律師, 590∼658)가 북쪽의 고구려와 동쪽의 왜구를 부처의 힘으로 막기 위하여 부처님의 사리를 석탑 3기에 모시고 수다사(水多寺)로 창건하였다. 그중 한 기는 약사전 앞에 세워졌고, 또 하나는 약수터 옆에 세워졌으며 나머지 하나는 절 앞바다 속에 수중탑(水中塔)으로 세웠다고 한다. 지금은 탐 3기중 약사전 앞에 세운 탑만 남아 있다.
창건자 자장율사께서 이 절에 머무를 때는 문수보살(文殊菩薩)을 친견하였다. 자장율사는 어느 날 꿈속에서 중국 오대산의 북대(北臺)에서 보았던 스님이 나타나 말하기를 “내일 저 큰 소나무 밑에서 꼭 만나자.”고 하여 이튿날 그 자리에 갔더니 그곳에서 문수보살이 계셨다는 것이다.
한편 등명낙가사의 자장 창건설과 관련하여 다른 주장도 있다. 법보신문의 사설 "59. 괘방산 안인항-삼우봉-등명낙가사"에 소개된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김부식(金富軾)의 아들로도 유명한 김돈시(金敦時, 1120~1170)의 시에는 ‘등명사(燈明寺)’라는 것이 있다. ‘등명낙가사 5층석탑’이 고려 때 조성된 탑이고, 김돈시가 고려 중기의 문신이므로 고려 때 존재했던 절인 것만은 분명하지만 신라 창건을 입증할만한 학술적 흔적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자장율사가 창건했다는 설이 있다. 이를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월정사 적멸보궁을 조성했던 즈음의 650년 전후일 것이다. 한때, 등명사가 ‘삼국유사’ 속 ‘수다사’였다는 설이 있었지만, 수다사 터는 진부에서 확인됐다. 다만, 도량 한편에 남아 있는 파손된 옛 석탑 부재가 신라 말 때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어 통일신라 말 창건 가능성은 남아 있다.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견해에 따르면 자장율사가 창건한 수다사는 신라 말 전쟁으로 불에 타 소실되었고, 고려 초기에 중창하며 등명사(燈明寺)로 재창건한다. 등명(燈明)은 부처님을 위해 켜놓은 등불을 뜻하며, '부처님의 법을 편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또한 이곳에서 공부하던 서생들이 심야에 괘방산에 올라 불을 밝히고 기도하면 과거에 급제했다는 연유에서 비롯되었다고도 한다.
불행하게도 등명락가사는 숭유억불 정책의 희생양이 되어 조선 중기에 폐사됐는데, 이것과 관련하여서 세가지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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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는 1592년 임진왜란 때 왜군이 불태웠다는 설이며, 나머지는 조선 왕실과 연관된다. 왕실에서 폐사시킨 이유 중 하나는 당시의 왕이 안질(眼疾. 눈병)이 심해 점술가에게 물어보니 ‘동해 정동 방면 큰 절의 쌀 씻는 물이 동해로 흘러들어 용왕을 놀라게 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왕의 특사가 이곳에 와보니 점술가 말과 같아 폐사시켰다고 한다.
또 다른 이유는 조선시대 숭유억불 정책의 단면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등명사가 한양의 궁궐에서 볼 때 정동(正東)에 있어 궁궐이 받아야 할 일출을 사찰에서 먼저 받으므로, ‘정동쪽 등불을 끄면 조선에서 불교가 자연적으로 소멸된다’는 누명을 씌워 폐찰로 만들었다.​
폐사지로 남아 있던 등명락가사는 경덕스님이 1000일 관음기도 후 1956년 절을 다시 세우며 관세음보살이 머문다는 보타낙가산을 착안 한 ‘낙가사’와 옛 절 이름 ‘등명사’를 합쳐 ‘등명낙가사’로 했다. 경덕스님은 1977년 영산전(靈山展) 건립을 시작했지만, 불사 회향을 보지 못한 채 1981년 세수 62세로 입적했다. 이후 불사는 1976년 경덕 스님이 잠시 조계종 총무원장을 맡으면서 인연을 맺은 청우스님이 이어 받았다.
1982년 주지로 취임한 청우스님은 영산전 불사를 시작으로 삼성각, 범종각, 요사채 및 종무소, 극락전과 약사전, 일주문 불사를 순차적으로 진행해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특히 영산전 500나한을 봉안한 후부터 이곳의 명물인 약수가 나오기 시작했다고 한다.

등명락가사에는 볼거리 등이 많다. 먼저 일주문은 다른 사찰의 일주문과는 달리 대리석으로 기둥을 세웠다. 기둥과 천장에 여의주를 다투는 모습의 용이 새겨져 있고, 또한 일주문 한가운데 나침반이 설치되어 있는 것이 특이하다.


일주문을 지나 오른편에 등명감로약수가 있다. 거북이 입에서 나오는 약수는 철분을 다량 함유한 탄산수로 톡쏘는 맛이 일품이며 부인병이나 성인병에 효과가 있다고 해서 유명하다.



약수를 한잔 마시고 왼편의 산길을 따라 올라오면 불이문이 나온다. 불이문을 지나 계단을 올라오면 정면에 대웅전이 있고 왼편에 영산전이 그리고 오른편에 극락보전이 있다. 대운전과 영산전 뒤편에는 삼성각과 진영각이 있다.


대웅전에는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과거불이신 제화갈라불과 미래불인 미륵불이 모셔져 있다. 세분의 부처님 뒷편에는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남이 계신다.

대웅전의 관세음보살도


특히 오백나한이 모셔져 있는 영산전은 반드시 들려보아야 할 곳이다. 이곳에 모셔진 오백나한님은 인간문화재이자 도예가인 유근형 옹이 3년 6개월의 각고끝인 1977년에 심혈을 기울여 청자로 구워 완성한 것이다. 세계에서 유일한 청자 나한군이라고 한다.

영산전

영산전에는 석가모니불을 주불로 하고 협시불로 사자를 타고 계신 문수보살과 코끼리를 타고 계신 보현보살이 모셔져 있고 그 주변으로 나한님들이 계시다.

청자 나한님들



이 곳 오백나한을 모신 영산전을 건립하게 된 것은 신라시대 이래 강원도 땅에 전승되어 오던 설화와 깊은 관련이 있다고 한다.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금강산으로부터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오대산으로 옮겨오게 되었을 때 오백나한들은 사리를 보호하기 위해 함께 배를 타고 내려왔다. 그리고 오대산에다 진신사리를 봉안한 다음, 문수보살은 강릉 한송사를 창건하여 머물렀고, 보현보살은 명주 보현사를, 오백나한은 이 곳에 머물렀다는 것이다. 그 이후 이 절은 영험있는 나한 기도처로 전승되었다고 한다. ​
극락보전 옆 오솔길을 따라가면 약사전이 나오고, 약사전 앞에는 자장율사가 세운 3기의 탑 중 하나인 오층석탑이 있다. 특히 이곳에서 보는 동해의 풍광은 그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장관이다.

오층석탑과 약사전

약사전에는 약사여래불을 중심으로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이 모셔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