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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바위의 전설이 깃든 강원 고성 화암사

산풀내음 2019. 9. 29. 17:57

화암사 미륵보살이 계신 곳에서 바라본 수바위


강원도 고성에 가면 신라 진표율사가 창건하신 화암사라는 사찰이 있다. 화암(禾巖)이란 한자를 그대로 번역하면 '쌀바위'인데 사찰명으로는 참 특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교의 대표 경전인 화엄경(華嚴經)에서 유래된 것인데 잘못 표기된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이 생겼지만, 일주문에 표기된 사찰명을 보니 화암사가 맞았다. 하지만 화암사의 맞은 편에 자리잡고 있는 수바위와 얽힌 이야기를 알게 되면서 비로소 왜 '화암사'인지를 이해하게 되었다.



신라 후기인 혜공왕 5년(769년)에 진표율사가 금강산 일만이천봉 가운데 남쪽에서 시작되는 첫 봉우리인 신성봉 아래에 화엄사(華嚴寺)를 창건하였다. 진표율사가 수 많은 대중을 거느리고 '화엄경'을 설했다하여 화엄사라 했다. 그리고 당시 진표에게 배운 제자 100명 가운데 31명이 천상으로 올라가고, 나머지 69명은 무상대도(無上大道)를 성취했다고 전한다. 화엄사가 ‘화암사(禾巖寺)​’로 불리기 시작한 시기는 1912년 경으로 조선을 식민지화한 일본이 종교와 신앙조차 권속화시키기 위한 수단의 하나로 전국의 절들을 31 본산 체제로 억압하면서 화엄사(華嚴寺)와 화암사(禾巖寺)라 혼용되던 절 이름이 화암사(禾巖寺)로 공식화되어 현재까지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화엄사가 화암사로 혼용된 것은 사찰 앞에 우뚝 솟아 있는 왕관모양을 한 ‘수(秀)바위’에 얽힌 설화 때문이다.​

수바위의 전설에 대하여 알아보기 전에 진표율사에 대하여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통일신라 초기의 대표적인 승려라고 하면 누구나 원효와 의상을 떠올릴 것이다. 특히 민중의 삶으로 들어가 불법을 전했던 원효의 가르침은 시간이 흐르면서 교학논쟁과 함께 왕실과 귀족을 위한 불교로 퇴색하기 시작한다. 이때 등장한 분이 바로 진표스님이시다. 

진표스님은 신라 33대 성덕왕대인 718년 완산주 만경현(지금의 김제군)에 서 태어났다. 속성은 정(井) 씨요, 아버지는 진내말(眞乃末) 어머니는 길보낭(吉寶娘)이다. 어린 시절 어느날 논둑에서 쉬면서 개구리를 잡아 버들가지에 궤어 물에 담가두고 산에 가서 사냥을 하다 잊어버리고 그대로 집에 돌아갔다. 이듬해 봄에 또 사냥하러 논둑에 가보니 개구리들이 버들가지에 궤인채 울고있자 진표는 크게 놀라 탄식했다. "내가 어찌 먹기를 위하여 해가 넘도록 이렇게 고통을 받게 하였단 말인가"하며 이를 계기로 발심 출가했다고 한다. ​

소년 진표는 금산수(金山藪, 지금의 금산사) 숭제(崇濟, 혹은 순제라고도 함)법사를 찾아 가르침을 청했다. 그때가 729년 열두살 되던 해이다.

진표가 스승께 여쭈었다. “ 부지런히 수행하면 얼마나 되어 계를 얻습니까”

스승은 “정성만 지극하면 1년을 넘지 않을 것이다”라고 했다.

진표는 금산사에서 10여년간 공부하다가 참된 계를 얻고자 스승의 곁을 떠났다. 미륵보살을 만나 계율과 가르침을 받고자 변산지방의 선계산 불사의방(不思議房)에서 불굴의 용맹정진을 시작했다. 그는 불사의방에서 하루에 쌀 다섯 홉을 먹으려 미륵보살 앞에서 신구의 3업을 참회하였다. 처음엔 7일밤을 기약하고 바위위에서 오체투지, 무릎과 팔뚝이 부서지고 바위에 피가 낭자했지만 그래도 아무런 감응이 없자 몸을 버리기로 결심하 고 다시 7일을 더하여 14일 되자 마침내 지장보살이 나타나 계법을 전수했다. 효성왕 4년(740년) 때의 일이다. 그러나 이에 만족치 않고 다시 정진해 경덕왕 11년(752년)에 미륵보살로부터 두 개의 간자(簡子, 점찰경에 따라 수행하는데 필요한 나무패)를 받았다.

762년 다시 금산사에 내려 온 스님은 이곳 옛 백제땅 서남부의 백성을 위 해 교화 일선에 나섰다. 금산사 중창이후에 스님은 발 길을 돌려 이 땅 곳곳에서 신음하는 백성들을 향했다. 유행중에 만난 마부를 귀의케해 제자로 받고 길상초(吉祥草)가 있는 속리산 골짜기에 표시를 해두었다. 후일 스님의 제자 영심등 제자들이 이곳에 절을 세우니 이곳이 길상사, 오늘의 법주사이다. 한편 법주사는 의신 조사가 553년에 창건을 하고 진표율사가 7년 동안 머물면서 중건하였다고 전해져 오기도 한다.

진표율사는 금산사와 법주사를 중건하고 금강산에 들어 3곳에 절을 세웠다. 동쪽에는 발연사(鉢淵寺)를, 서쪽에는 장안사(長安寺), 남쪽에는 화엄사를 두어 금강산을 미륵부처님의 정토로 삼았다. 그리고 진표율사는 발연사에서 입적하셨다.


(출처 : 불교신문, "위대한 전법자들-진표율사")


이어서 일명 ‘쌀 바위’로 불리는 수암(秀巖)과 관련해 전해지는 이야기를 하면 다음과 같다.

시대가 흘러갈수록 민가와 멀리 떨어진 화암사는 스님들이 탁발을 하기조차 어려워 사세는 흥하지 못했다. 이러한 시기에 화암사에는 오로지 수행에 전념하고 있는 두 스님이 있었다고 한다.

“이번 생에는 모든 걸 전폐하고 오로지 수행에만 몰두해 반드시 생사를 초월하는 깨달음을 성취하세.” “그렇게 하세. 나도 이번 생에는 화암사에서 일념 정진해 생사의 고리를 끊고 영원한 복락을 누리는 깨달음을 얻겠다고 다짐한 지 오래 되었다네.”

이렇게 한 두 스님은 화암사 ‘수 바위’ 아래서 일념정진에 들어갔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두 스님은 바위 아래 토굴에서 좌선삼매에 들었다. 하지만 정진만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지는 않았다. 수행에 필요한 최소한의 양식은 있어야했기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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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게. 우리가 정진하는 것은 좋은데 아무것도 먹지 않고 정진하기는 참 힘든 일이 아닌가. 더구나 이 화암사는 민가도 멀어 한번 탁발을 나가려면 한나절은 밖으로 나가야 하니 큰 걱정이구만.”

살림살이가 어려웠지만 두 스님은 한 명씩 교대로 마을로 내려와 탁발을 해서 며칠씩 정진에 들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 두 스님은 똑같이 꿈을 꾸게 되었다. 하얀 백발의 노인이 나타나 그들에게 말했다. “나는 이 산을 지키는 산신령이오. 두 스님의 수행이 참으로 대단해 보여 내가 특별히 선물을 주고자 하오. 내일부터 ‘수 바위’ 아래에 가면 조그만 구멍이 있을 것이오. 그곳을 끼니 때마다 주장자를 대고 세 번 흔들면 필요한 양식이 나올 터이니 스님들은 양식 걱정 없이 수행에 전념할 수 있을 것이오.”

백발노인은 한 가지 단서를 달았다. “두 스님은 절대 쌀이 나오는 위치를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서는 안 될 것이오. 그리고 꼭 세 번만 흔들어야 하오. 이 약속을 지키지 못하면 나는 스님들에게 더 이상 양식을 드리는 자비를 베풀 수가 없게 됨을 꼭 명심하세요.”

다음날 잠에서 깬 두 스님은 자신들이 꾼 꿈을 서로에게 고백했다. “정말 이상한 일이군요. 어디 한번 그곳에 가 보기나 합시다.” 두 스님은 새벽 예불을 마치고 백발노인 일러준 수 바위 아래로 가 보았다. “스님, 정말 이곳에 구멍이 있어요. 어디 주장자로 한번 건드려 보기나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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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스님이 주장자로 바위 구멍을 건드렸다. 순간 바위에서 쌀이 나오기 시작했다. “아니, 이럴수가…” 많은 양은 아니지만 두 스님이 하루는 족히 먹을 만큼의 쌀이 흘러나왔다. 너무한 감복한 두 스님은 지극한 마음으로 합장하며 감사의 뜻을 표했다.

“필시 이런 기적은 우리 두 스님이 열심히 정진하라는 산신의 배려일 것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우리가 처음 원을 세웠던 뜻을 반드시 이루어 내도록 용맹정진합시다.”

두 스님은 그때부터 더욱 분발해 정진하기 시작했다. 이런 소문은 삽시간에 주변은 물론 다른 사찰에까지 전해지게 되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화암사 수 바위를 ‘쌀 바위’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과연 화암사는 영험이 있는 사찰이이야.”

두 스님의 정진력을 날이 갈수록 치열해졌다. 곧 대선사의 출현을 기대하면서 몇 년이 지나갔다. 화암사의 명성이 자자해지자 사찰을 찾는 스님들의 발길도 잦아지기 시작했다. 두 스님은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직분에 충실해가며 깨달음을 얻겠다는 일념으로 정진을 하고 있었지만 절을 찾는 객스님은 차츰 불만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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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수행에 열중하고 있다지만 절을 찾아오는 스님에 대한 대접이 너무 소홀한 것 아니요?” 이런 불만을 터트릴 때마다 두 스님은 “우리 절은 원래부터 가난해 대접할 것이 없으니 이해를 하기 바란다”는 상투적인 말만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화암사에 머문 객스님이 수행하고 있는 두 스님의 뒤를 밟기 시작한 것. “그래 당신들만 먹을 쌀을 바위에서 가져온다 이거지. 어디에서 그런 쌀이 나오는지 나도 한번 봐야겠어.”

살금살금 두 스님의 뒤를 따라온 객스님은 쌀이 나오는 구멍의 위치를 알아버렸다. “그래, 저기에다 주장자를 대고 세 번 흔들면 쌀이 쏟아져 나오는구나. 나라고 못할 일이 없지.”

두 스님이 쌀을 받아가지고 내려가자 객스님은 자신이 가져온 주장자를 두 스님이 갖다 댄 곳에 가져갔다. “쌀아 나오너라. 무지무지 많이 나오너라.”

이렇게 말을 하며 사정없이 주장자를 흔들었다. 하지만 이게 웬일인가. 그렇게 나오던 쌀이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된 거야. 방금 스님들이 할 때는 잘도 나오더니만.”

갑자기 쌀 바위에는 천둥번개가 치면서 쌀이 나오는 구멍은 사라져버렸다. 이런 일이 있는 후부터는 한 톨의 쌀도 나오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객스님이 욕심을 부려 쌀 바위에서 쌀이 끊어졌다고 한다.


(출처 : 불교신문, "38 고성 화암사 쌀바위")

화암사는 여러 차례나 화재로 큰 손실을 입었다. 불이 잦은 이유는 절 남쪽에 있는 수바위와 북쪽에 있는 코끼리모양의 바위가 서로 맥이 화해롭지 못하고 상충하여 그 화기가 절로 떨어졌기 때문이란다. 1622년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복원되었지만 1863년(고종 원년)에 또 다시 화재로 소실되어 현재의 자리로 이전 중창된다. 하지만 이 역시 한국전쟁으로 다시 소실되었고 1986년 중창되면서 현재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일주문을 지나 계곡을 따라 이어지는 길을 조금 올라가면 고승들의 부도군이 있다.

부도군과 소원바위 등을 지나면 부처님의 초전법륜상이 있다. 초전법륜이란 붓다가 보리수 아래서 깨달음을 성취한 후, 녹야원에 가서 예전에 함께 고행했던 다섯 수행자에게 처음으로 가르침의 바퀴를 굴린 것을 말한다.

수바위, 화암사에 이르기 직전 왼편에 수바위로 가는 길이 있다. 이 길을 따라 5분 정도 산길을 오르면 수바위가 자리하고 있다.



현위치라고 표기된 곳이 수바위가 있는 곳이라고 생각하면 될 듯하다. 화암사 숲길은 중하 난위도 정도로 쉽게 그리고 편하게 즐길 수 있는 산책길이다.

화암사 숲길 정상



화암사 숲길 산책을 마치고 화암사 계곡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너면 화암사 대웅전으로 가는 계단이 나온다.

대웅전 앞마당에서 바라본 수바위

대웅전 바로 옆에는 명부전이 있다

대웅전 뒷편에 모셔져 있는 석가모니 고행상

대웅전 뒤로 2-3분 정도 더 가면 삼성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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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부전과 템플스테이 공간 옆으로 나있는 길을 따라 조금 올라 가면 최근에 조성된 미륵불을 뵐 수 있다. 이곳에서는 고성 앞바다가 한 눈에 보여, 일출이 매우 아름다울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