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9월/9월 8일

대일강화조약(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 미일안보조약 조인

산풀내음 2016. 8. 16. 23:04

19519 8,

대일강화조약(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 미일안보조약 조인

 

1951 98일 제2차 세계대전 참전 연합국 49개국과 일본 사이에 전쟁상태를 종결시키기 위한 평화조약(샌프란시스코 조약, 대일강화조약이라고도 함)이 미국 샌프란시스코 오페라하우스에서 체결됐다.

샌프란시스코 강화 회의는 미국과 영국이 주도했다. 주요 의제는 전후 일본의 영토를 어디까지 정할 것인가와 일본의 군사력 범위 그리고 일본이 침략한 나라에 대한 배상 등이었다.

 

당초 회의 초청장은 55개국에 발송됐다. 그러나 인도, 미얀마, 유고슬라비아는 회의에 불참했다. 인도는 강화 내용이 오키나와를 미국 지배하에 두려고 한다는 점, 일본이 미국과 안전보장조약을 체결하고 미군주둔을 인정했다는 점 등을 들어 반대했다. 이 점이 다시 아시아의 평화를 위협하는 요인이 된다고 우려한 것이다. 미얀마는 일본의 배상책임이 너무 가볍다고 불만을 표시했다. 강화회의는 이들 세 나라의 불참으로 처음부터 난항을 겪었다.

 

52개국 참가로 시작된 회의에서도 불만이 속출했다. 뉴질랜드 오스트레일리아는 일본의 군비에 일체 제한하고 있지 않은 점은 일본 군국주의 부활로 이어진다고 반대했다. 인도네시아와 필리핀은 배상이 필요한 것은 자신들과 같은 작은 나라임에도 대국중심의 내용이 돼 있다고 반발하고 한때 조인을 보류하는 태도를 비치기도 했다. 소련은 먼저 미국과 영국을 중심으로 추진되는 회의를 비판하고 남 사할린, 쿠릴열도를 소련영토로 할 것, 일본 군비의 상한선을 둘 것, 원폭 세균 화학 병기 등의 실험 보유를 금지할 것 등 13개항의 수정의견을 제출했다.

 

그러나 미국은 일본을 패전케 한 주역은 미국이며 회의 중심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며 소련의 수정안을 묵살했다. 결국 소련과 폴란드, 체코슬라비아 공산권 3국은 비준을 거부했다.

 

이 강화회의에는 중대한 결함이 있었다. 일본과 전쟁으로 가장 피해가 컸던 한국, 중국 그리고 몽골이 초청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결정된 조약은 일본이 일으킨 전쟁해결이 되는지, 그리고 아시아와 세계평화와 연계되는지 일본국내에서도 논란이 됐다.

 

결국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은 냉전과 맞물려 일본을 패전의 굴레에서 자유롭게 해방시켜준 요식적인 절차에 불과했다. 이렇게 조약이 일본에게 유리하게 전개했던 것은 일본측의 치밀하고 집요한 대미설득에 힘 입은 바 크다.

 

일본의 요시다 수상은 “과거 평화조약은 패전국 대표의 힘겨운 절충 노력에도 불구하고 패전국의 주장이 거의 반영되지 않은 채 승전국 측의 강압에 맺게 되는 것이었지만, 이번 조약은 이 난처한 절충 역할을 미 대통령 특사인 J. F. 덜레스(John Foster Dulles, 1888-1959)가 맡아주신다고 했다”고 말했다. 결국 일본은 미국이 정해놓은 룰에 하등의 불만 없이 응하는 꼴이었다.

 

강화조약 조인 후 요시다 시게루 수상은 미국과의 군사동맹을 위한 미일안전보장조약에도 서명했다. 1952 4 28, 이 조약들이 정식 발효됨으로써 연합군의 일본점령도 끝이 났고, 일본은 자유주의 진영의 일원이자 주권국가로 국제사회에 복귀했다.


 

Japanese Prime Minister Shigeru Yoshida (18781967, in office 194647 and 4854) and members of the Japanese envoy sign the Treaty of San Francisco.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당시 미국과 일본의 주역이었던 덜레스 미 국무장관(왼편), 시볼드 주일 미국 대사(가운데), 요시다 시게루 일본 총리 겸 외상(오른쪽). 요시다는 대미 비밀외교를 통해 미-일 동맹구조를 굳건히 함으로써 패전으로 인한 손해를 최소화하고 일본을 재건시키는 교두보를 마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