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9월/9월 8일

아데나워 서독 수상, 2차 대전 후 첫 소련 방문

산풀내음 2016. 8. 16. 23:18

19559 8,

아데나워 서독 수상, 2차 대전 후 처음으로 소련 방문

 

1955년 초, 서방과 소련 사이에는 긴장완화 문제가 공식적으로 거론되고 있었다. 1955년 파리협약으로 주권국가로 인정받고 NATO의 새로운 회원국이 된 독일은 더 이상 소련이 무시할 수 있는 국가가 아니었다이런 상황에서 소련은 1955년 6월 7일 서독에 비밀 전문을 보낸다. 내용은 외교관계 수립 교섭을 위한 아데나워 (Konrad Adenauer, 1876 1월 5 ~ 1967 4월 19) 서독 수상의 모스크바 방문 요청이었다.

 

만약 소련과 서독이 외교관계를 맺는다면 동-서독의 분단을 고착화하고, 2차 세계 대전 패전으로 상실한 독일 동방영토를 포기한다는 뜻을 내포했기에 서독의 총리인 콘라드 아데나워는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아데나워는 평소에도 소련에 포로로 잡혀있는 동포들을 위해 전쟁포로 기념일까지 재정할 정도로 전쟁포로 귀환에 열심이었다. 거기다 서독 국민의 1/4이상이 자신의 친인척 중 전쟁포로가 있다고 할 정도로 그 무엇보다도 전쟁포로 귀환은 서둘러야 했기에 소련 행을 결심한다그때까지도 독일은 소련 땅에 얼마나 많은 포로들이 생존해 있는지 확인조차 못하고 있었다. 단지 수십만 명에 달한다고 추정되고 있을 뿐이었다.

 

2차 대전 후 연합군의 독일 포로 송환은 1948년에 마무리되었지만, 소련의 경우에는 "너희들이 파괴한 건 너희들이 재건하라"는 원칙 하에 포로를 석방하지 않고 키예프와 캄차카 등의 노동 캠프에서 노동력으로 쓰고 있었다. 그리고 1952년부터 일부 독일군 포로를 석방하기 시작하였지만 1955년 당시 가혹행위와 강제노동의 열악한 환경 하에서 120만 명에 달하는 독일군 포로가 이미 사망했다는 주장이 있을 정도로 수많은 독일군 포로들이 강제노동으로 죽어 나가고 있었다.


 

시베리아 강제 노동에 동원된 독일군 포로들

 

 

1955 9 8 17시 아데나워는 모스크바 30킬로미터 지점에 있는 브누코보공항에 도착했다. 아데나워는 이곳에서 전현 기대하지 않았던 친절한 영접을 받았다. 환영행사는 국빈예우로 치러졌고, 크렘린궁에서 나온 관료들을 선두로 전승국 대사들과 115명의 의장병들이 '독일연방공화국 수상'을 환영했다. 소련 역시 아데나워 만큼 서독과의 수교가 절실했기에 소련은 모든걸 최고급 최상급으로 대접했다.



1955 9 8일 소련 방문 당시

 


종전 이후 처음으로 소련 땅에서 독일 국가가 울려 퍼졌다. 하지만 아데나워의 방문을 보도하는 뉴스 영화를 보고 있던 전쟁포로들은 눈물을 흘렸다.

"그토록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야 처음으로 우리는 독일국가를 들었고, 소련기와 같은 높이에서 독일국기가 나부끼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공군기의 모체에는 십 년 전 러시아인들이 우리에게서 떼어내 버린 철십자 훈장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가슴속을 흔드는 뭉클한 순간이었습니다."

 

서로 다른 목적을 갖고 회담에 임한 서독과 소련은 시작부터 충돌했다. 후루시초프는 아데나워에게 독일군대의 잔악성과 독일의 전쟁에 대한 책임을 강조하였고 이에 대해 아데나워는 과거 문제의 언급은 미래를 위한 방해라며 회피하면서 충돌은 시작되었다.

 

또한 양국간 외교관계 수립과 관련하여 소련은 전제조건 없는 외교관계의 수립을 원했지만 독일은 전쟁포로의 석방을 전제로 내걸었다이에 대해 소련 국방장관 불가닌은 "소련 안에 전쟁포로들은 없소! 소련에는 히틀러의 군대에 있던 나치전범들, 러시아를 파괴하고 평화를 해치고 인간성에 반하는 행위를 저지른 죄로 유죄판결을 받은 범죄자들이 있을 뿐이오! 그들은 이미 인간이기를 포기한 사람들이오!"라고 대꾸했다.


하지만 소련은 아데나워 방문 전에 독일군 포로 송환을 이미 확정하고 1955 3월 시베리아에서 3천 명에 이르는 독일군 포로들을 모스크바 주변에 집결시켜 독일로 송환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또한 동독에도 이런 내용을 이미 언급한 상황이었다.

 

시작은 서로의 주장만 되풀이 하는 딱딱한 분위기였지만, 함께 술을 마시고 식사하는 동안 서서히 풀려가기 시작했다. 마침내 1955 9 12일 저녁, 성대한 연회에서 아데나워는 후루시초프와 불가닌으로부터 포로 석방에 대한 구두 약속을 얻어 낸다. 결국 전쟁포로 석방과 외교관계 수립이라는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구두 허가. 그게 전부였다. 서명도 없고 보증서 같은 것도 없었다. 아직까지 남아있는 소련내의 반독여론은 정식 조약문과 같은 형태의 포로송환이 불가닌과 흐루시초프와 같은 이들의 지지기반 약화를 가져올 우려가 높았다. 그렇기에 포로는 송환하되 어디까지나 비문서화하여 처리되길 바란 것이다.

 

성공적인 회담결과를 가지고 1955 9 14일 아데나워는 서독으로 돌아왔고 그리고 10 9, 10여 년 이상이나 소련에 억류돼 있던 마지막 독일군 포로들이 풀려나 독일로 돌아왔고, 국민들은 이를 열렬히 환영했다.

 

한편 외국인 의용 친위대원들도 송환되었다. 서독정부는 이들도 원할 경우 자국 내에 정착할 수 있도록 했다. 스페인의 프랑코는 스페인 출신 친위대원의 귀환을 무조건 환영한다고 발표하고, 위로금까지 지불할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프랑스 출신 친위대원들은 대부분 서독에 남았으며, 네덜란드 출신들은 귀환을 선택했다. 서독 정부는 독일군으로 단 하루라도 복무한 사람들에게는 연금을 지급했으며, 전쟁 포로로 소련에 억류된 사람들은 추가로 보상금을 받았다. 구소련이 붕괴된 후 발트 3국의 무장 친위대 복무자들에게도 연금이 지급되게 되었다.


The mother of a prisoner thanks Konrad Adenauer upon his return from Moscow on September 14, 1955. Adenauer had succeeded in concluding negotiations for the release to Germany, by the end of that year, of 15,000 German civilians and prisoners of wa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