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사진/경남

다시 찾은 남해 보리암

산풀내음 2019. 8. 20. 21:30


갑작스런 베트남 출장..생각보다 시간이 길어져 15일 새벽에야 귀국하게 되었다. 피곤한 몸을 수면으로 보충하고 저녁 11시쯤 남해 보리암으로 아내와 출발하였다. 비록 낮이지만 충분한 수면과 함께한 거의 하루종일 휴식을 취했다고 생각했는데 2시간 정도 지나자 졸음과 함께 피곤함이 몰려왔다. 중간에 휴게소에 들러 틈틈히 쉬면서도 새벽 예불시간인 3시 30분에는 맞추어 볼려고 노력했지만, 보리암 주불전인 보광전에 도착한 시간은 새벽 4시.


예불시간에 딱 맞추지는 못했지만, 조용한 산사의 새벽은 그 자체로 큰 기쁨을 나에게 주었다.



이 사진은 2018년에 촬영한 보리암



한국의 아름다운 명산 남해 금산(錦山, 681m) 정상에는 우리나라 3대 관음기도 도량(남해 보리암, 강화도 보문사, 낙산사 홍련암)중 하나로 손꼽히는 보리암(菩提庵)이 기암괴석들의 호위를 받으며 자리 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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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지 소원은 반드시 들어주신다는 우리나라 대표적인 기도도량인 보리암에는 두 가지의 창건설화가 전해져 오고 있다.

그 하나는 가락국의 김수로왕이 왕비로 맞은 인도의 허황옥 공주가 삼촌인 장유선사와 함께 처음 찾아든 곳이 가락국이 자리한 김해와 멀지않은 이곳 금산 보리암이라 한다. 남해안에서 가장 잘 보이며 하늘과 산, 바다 위의 천태만상 변화에 매혹되어 보리암에 터를 잡아 아유타국에서 모시고 온 관세음보살님을 모셨는데 지금 보광전의 삼존불인 관세음 보살님이 바로 그때의 보살님이라고 한다.

다른 한 가지는 신라 문무왕 3년(683년)에 원효대사가 온 산이 마치 방광(放光)하는 듯 빛나는 모습에 이끌려 이곳으로 오게 되었으며 초당을 짓고 100일 기도를 올렸다. 100일 기도를 회향하는 날 관세음보살을 친견하고 그 뒤 산 이름을 보광산, 초암의 이름을 보광사(普光寺)라 했다고 한다.

한편 훗날 이성계는 전국의 이름난 성지를 돌며 새 나라의 개국을 기원한다. 계룡산과 지리산을 거쳐 이곳 보광산에 이른다. 그는 100일 기도를 올리면서 “새 나라의 문이 열리면 이 산 전체를 비단으로 덮어 주겠다”고 약속을 한다. 왕이 된 후 과거의 약속을 기억해낸 그는 신하들에게 보광산에 비단을 보내라고 명령한다. 이에 신하 중 한 사람(정도전이었다는 설이 있다)이 온 산을 감쌀 비단을 구하기도 쉽지않을 뿐더러 비단은 언젠가는 썩어서 없어질 것이므로 차라리 산의 이름에 비단 금(錦)자를 넣어서 금산으로 바꾸면 어떻겠냐고 제안하여 보광산이 금산이라는 이름으로 바뀌게 된다.

그리고 현종 원년(1660년)에 조선 개국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 절을 왕실의 원당으로 삼고 보리암으로 개명하였다. 이는 속세의 최고 위치인 왕을 낸 도량이므로 불가의 최고 경지인 깨달음도 능히 이룰 도량이라는데에서 보광사에서 보리암으로 바뀌게 된 것이라고 한다.

* 보리

「보리」는 범어의 보오디(bodhi)를 적은 우리 불교의 관용어인데 한문으로는 「普提」라고 적는다. 원 뜻은 깨달았다는 의미다. 지혜 또는 도(道)라고도 번역된다. 이 깨달음은 부처님 뿐만 아니라 성문·연각 모든 tdj자가 성스러운 도과를 얻은 것 까지도 의미하지만 그중에서 부처님의 깨달음이 최상이으로 「보리」라고 일러오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 무상정득각 또는 무상보리라고 한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보리」는 부처님의 무상보리를 의미한다.

이 깨달음을 구하여 수행하는 수행자를 보살이라고 하는데 보살은 깨달음을 구하는 중생이라는 뜻이 있다. 부처님께서는 인도 부다가야 숲에서 아슈바타라는 나무밑에 앉아 수행하여 무상보리를 이루셨는데 그 나무를 보리수. 부다가야를 보리도량이라고 한다. ​


- 출처 : 불광미디어, "[불교용어해설] 보리(普提)" -

보리암의 주불전인 보광전(普光殿)은 신라 신문왕 3년(683년) 초창 이래 여러번의 중건 중수를 거쳤으며 현 보광전은 1968年에 중건하고, 2000年에 중수하였다. 보광전에 모신 주불은 서천축 아유타국 허공주가 모시고 왔다는 관세음보살(좌보처 남순동자, 우보처 해상용왕) 삼존상(三尊像)이며 목조관음보살좌상불감은 2015년 1월 15일 경남 유형문화재 제 575호로 지정되었다.


보리암의 주불전인 보광전



보광전 뒷편 작은 토굴에 모셔져 있는 석가모니부처님


보리암전 3층 석탑(菩提庵前 三層石塔)은 나쁜 기운을 억누르고 약한 기운을 보충하는 비보(裨補)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3층석탑과 관련하여서는 재미나는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다. 옛날 가락국의 허태후가 인도에서 올 때 풍랑이 심해 못 오게 되자 화사석이 영험이 있어 화사석을 배에 태우면 풍랑을 재운다고 하여 그 화사석을 배에 태우고 무사히 왔다고 한다. 이후 원효대사가 허태후가 인도에서 가져온 불사리를 이곳에 모셔 탑을 세웠으며 그때 함께가져 온 화사석으로 탑을 세웠다고 한다.



3층석탑과 해수관음상

보리암 주 법당인 보광전에서 약 200m 떨어진 곳에는 태조 이성계가 기도한 곳이 있는데 이곳에는 이를 기념하는 비 하나가 서 있다. 광무 7년(1903년 5월) 종일품 숭정대부의정부 찬정 윤정구가 "황지를 받들어 찬술하고 썼다"는 '남해금산영응기적비'다.



이 길을 따라 내려감과 올라감을 두번 반복하면 이성계가 기도한 곳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