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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공산 은해사와 중암암을 찾아서 ....1) 은해사 이야기

산풀내음 2019. 10. 5. 11:35



팔공산에는 수많은 사찰들이 있다. 동화사와 파계사가 대구지역의 대표적인 사찰이라고 한다면 은해사는 영천 지역의 대표적인 사찰이라 할 것이다. 은해사가 있는 영천지방은 신라시대 영지(靈地) 네 곳 중 한 곳으로 꼽았으며, 특히 은해사 산중에는 삼국통일의 일등공신 김유신의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사실 은해사를 가게 된 계기는 우연한 기회에 보게된 12부작의 '다큐멘터리 암자순례'라는 작품이었다. 다큐 속의 모든 암자들이 모두 다 가서 기도해 보고 싶은 곳이었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내 가슴에 와닿는 곳이 있었으니, 그곳이 바로 '중암암(中巖庵)'이었다. 그리고 그 중암암이 있는 곳이 바로 은해사인 것이다.

은해사(銀海寺)는 신라 헌덕왕 원년(809년)에 혜철선사가 해안평(海眼平)에 해안사(海眼寺)라는 이름으로 지은 사찰이다. 헌덕왕은 조카인 40대 애장왕을 폐위시키고 즉위한 인물로 피비린내 나는 정쟁 속에 숨진 이들의 원혼을 달래며 왕의 참회와 국가 변영을 위해 왕실의 발원으로 창건된 사찰이다. 처음 ​해안사가 지으진 해안평의 정확한 위치는 알려지지 않고 있지만, 대략 은해사의 사내암자인 운부암 가는 길로 추론하고 있는 듯하다.

은해사는 유난히 화재로 인한 피해가 많았다. 특히 1545년 조선 인종 원년에 큰 화재가 발생해 사찰이 전소되었다. 이듬해인 1546년 명종 원년에 나라에서 하사한 보조금으로 천교화상이 지금의 장소로 법당을 옮겨 새로 절을 지었다. 이 때 법당과 비석을 건립하여 인종의 태실(胎室)​을 봉하고 은해사라고 이름을 짓게 되었다. ​

이때의 은해사란 의미는 부처, 보살, 나한 등이 중중무진으로 계신 것처럼 웅장한 모습이 마치 은빛 바다가 춤추는 극락정토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또한 은해사 주변에 안개가 끼고 구름이 피어 날 때면 그 광경이 은빛 바다가 물결치는 듯 하다고 해서 은해사라고도 한다. ​

명종 18년(1563년) 다시 화재로 소실된 것을 다음 해 묘진 (妙眞)스님이 중창하였고,1589년 (선조22년)  법영 (法英하) , 의연 (義演고) , 광심 (廣心) 세 스님의 발원으로 일대 중창 불사를 하여 오늘날의 은해사 기본 당우의 골격을 이루었다. 현종 13년(1847년)  다시 화재로 소실된 것을 팔봉 (八峰) , 해월 (海月)  두 스님이 중수하였다.

은해사는 1943년까지만 하더라도 은해사에는 건물이 35동 245칸에 이르러 대사찰의 위용을 자랑했지만, 현재 은해사 본사 내에는 19개 건물만이 자리하고 있다.​

일주문에서 은해사 보화루까지 1km 남짓 숲길 산책로가 잘 조성돼 있다. 이길을 금포정(禁捕丁)이라고 하는데 '일체의 생명을 살생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기록에 의하면 1714년 조선 숙종 때 일주문 일대의 땅을 매입하여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초에 소나부 숲을 조성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또한 길 중간에는 1천년을 산 참나무와 느티나무가 엉켜 있는 모양이 시선을 잡는데, `사랑나무`라 이름 붙혀져 있다.

사랑나무. 수종이 서로 다른 두 나무가 접촉하여 오랜 세월이 지나서 합쳐진 남를 연리목이라고 한다. 수령이 100년 정도로 추정되는 참나무와 느티나무가 서로 붙어 안고 있는 형태로 연리목 중에서도 매우 특이한 경우라고 한다. 

길을 따라 올라가면 왼편에 부도군이 있다.


보화루에 들어서기 전에는 인공폭포도 만날 수 있다. 이 폭포는 기암의 절벽에 인공으로 물을 끌어올려 만들어졌다. 자연암벽에 만들어 놓아 무척 아름답다. 물이 떨어지는 소리도 우렁차 일상에서 쌓인 스트레스가 확 풀리는 듯하다. 폭포를 지나 보화루에 들어서면 은해사 경내로 진입하게 된다.

경내의 극락보전(예전에는 대웅전이었고 대웅전 편액은 추사 김정희 선생이 썼다)은 웅장하면서도 단아한 대 사찰답게 고요하다. 은해사 앞마당에 자리 잡고 있는 향나무는 2009년부터 보호수로 지정돼 있으며, 은해사 범종각 2층에는 법고 대신 징이 걸려있다. 이외에 지장전, 설선당, 산령각 등이 있다. 



은해사 정문 역할을 하고 있는 보화루. 현판의 글씨는 추사 김정희 선생의 작품이라고 한다.



보호수인 향나무


은해사는 추사 김정희(金正喜, 1786년 ~ 1856년) 선생과의 인연이 깊다. 추사 김정희의 아버지이자 영조의 부마(駙馬)였던 김한신의 손자인 김노경(金魯敬, 1766년 ~ 1837년)이 경상감사로 부임한 당시 김정희 선생과 은해사의 첫인연이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추사 선생은 안동 김씨와의 세도 다툼에 패하여 55세 되던 헌종 6년(1840) 9월 2일에 제주도로 유배되어 9년 세월을 보낸 다음 헌종 14년(1848) 방면되어 다음해 봄에 64세의 노인으로 다시 서울로 돌아온다. 유배중에 불교에 더욱 깊이 귀의하게 된 추사 선생은 영파대사의 옛터이며 또 자신의 진 외고조인 영조대왕의 어제 수호완문을 보장하고 인연 등으로 헌종 13년의 대화재 뒤 헌종 15년에 마무리 지은 은해사 불사때 은해사, 대웅전, 보화루, 불광, 일로향각의 다섯 점의 글씨를 기꺼이 써 준 것이다.

(출처 : 은해사 홈페이지)



은해사는 암자와 말사를 비롯하여 인근 지역의 성보문화재를 수집해서 도난과 훼손을 방지하고 체계적으로 보존, 관리, 전시하기 위하여 2009년 5월 성보박물관을 건립, 개관하였는데 이곳에는 보물 제1270호 은해사 괘불 탱화, 대웅전 아미타 삼존불, 후불탱화, 괘불, 신장탱화, 보물 제1604호 은해사 순치3년명 금고 등 수 많은 문화재가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 애석하게도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보수공사로 인해 장기 휴관을 한다고 하여 들어가 보지는 못하였다.


한창 공사 중인 탑과 성보박물관



 팔공산 은해사와 중암암을 찾아서 ....2) 중암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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