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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공산 은해사와 중암암을 찾아서 ....2) 중암암

산풀내음 2019. 10. 5. 12:41

석문을 지나 보이는 중암암. 앞의 전각이 중암암 대웅전이다.


중암암은 은해사(銀海寺)의 산내암자(山內庵子)이다. 자칫 암자의 이름을 ‘중앙암(中央庵)’이라 잘못 알기 십상이지만, 그게 아니라 ‘중암암(中巖庵)’이다. 해발 고도 780m의 높은 산정에 위치하고 있는 중암암은 말 그대로 바위에 세워진 암자이다.

​은해사에는 중암암 이외에도 서운암, 기기암, 백흥암, 묘봉암, 운부암 등 암자가 있다. 자료에 따라서는 거조암(사)과 백련암을 포함하여 8개 암자라고도 하는데, 은해사의 홈페이지에 소개된 자료를 보면 거조암(사)과 백련암은 산내암자가 아니라 은해사 말사로 소개되고 있으니 은해사의 산내암자는 6곳이라고 하는 것이 옳을 듯하다.

6곳의 암자 중에서도 특히 기도처로 잘 알려진 곳이 중암암, 묘봉암, 운부암이다. 처음에는 세곳 모두를 하루에 둘러볼 계획을 잡았지만, 각 암자 사이를 연결하는 길을 찾지 못해 이번에는 가장 가보고 싶었던 중암암과 은해사를 둘러보고 기도하는 것으로 만족하여야만 했다. 그리고 비록 대중에게 개방되어 있지 않아 안에 들어갈 수는 없었지만 중암암 가는 길목에 있는 백흥암도 밖에서 잠시 둘러보았다.

백흥암(百興庵). 혜철(惠徹)국사께서 861년(경문왕 1년)에 착공하여 873년에 완공하였으며, 절 주위에 잣나무가 많아서 처음에는 백지사(柏旨寺)라 불렀다고 한다. 그리고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이 견훤의 난리를 피하여 이곳에 은거하기도 하였다. 조선 명종 원년인 1546년에 백흥암으로 개칭하였다. 

백흥암은 비구니 수도도량으로 부처님오신날과 7월 백중을 제외하고는 일반 참배객들의 출입을 일체 금하고 있다. 건물로는 극락전과 영산전 ․ 명부전 ․ 산신각 ․ 진영각 ․ 선실 ․ 요사채 등이 있다.​


중암암은 신라 흥덕왕 9년(834년)에 심지왕사(心地王師)가 창건하였다. 그 뒤 꾸준히 수도승들의 수행처로 이용되어 오다가, 조선 순조 23년(1823년) 태여(太如) 대사가, 조선 순조 34년(1834년)에 우일(宇一)과 유엽(有曄)이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금의 가람은 최근에 중건된 것으로 법당과 산신각은 1958년에, 요사는 1980년대에 새로 지었다.

은해사에서 출발한다면 비구니 스님들의 도량인 백흥암을 지나 중암암까지는 4.8㎞로 짧지 않은 길이다. 하지만 마지막 1km를 제외하고는 너무나 평탄한 길이어서 그닥 힘이 드는 곳은 아니다. 천천히 걸어도 2시간이면 충분하다. 또한편 중암암의 요사채가 있는 곳까지는 차로도 이동이 가능하니, 접근성의 측면에서는 어려움이 없는 곳이라 할 것이다.

은해사 보화루를 지나 조금 더 올라가면 이런 현수막이 있다. 아마도 관음기도처로 잘 알려진 묘봉암까지는 정기적으로 차량이 운행되는 듯하다.


여기에서 중암암까지는 약 900m로 비로소 산행의 맛을 조금 느낄 수 있다.


​암자에 이르기 전에 종무소가 우리를 제일 먼저 반긴다. 종무소를 지나 좁을 산길을 따라 조금 걸으면 세롭게 짓고 있는 산신각(?)이 나오고 이어서 삼성각과 관음전이 있다. 

종무소

종무소를 지나 이 계단을 오르면 좁은 산길이 중암암으로 안내한다.

새롭게 짓고 있는 산신각.

삼성각과 관음전


​삼성각과 관음전을 지나면 왼편으로 능성재로 올라가는 길과 함께 정면에 자연석 두개가 서로 기댄 형태의 석문을 마주하게 된다. 이 석문이 바로 중암암을 '돌구멍 절'이라는 이름을 갖게 한 장본인이다. 사람 한 명이 지날 수 있는 수준의 석문을 지나면 바로 법당 앞마당이다.


30m쯤 되는 절벽 위에 자리잡은 중암암은 팔공산의 정기가 가장 집중된 곳에 있다고 하여, 참선 등 수도정진과 기도 만을 위한 장소이며, 따라서 이외의 의식들 예를 들어 영가들을 위한 제 등은 거행하지 않는다고 한다.


중암암에는 해우소와 관련하여 재미나는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안타깝게도 중암암 내에 있는 요사채는 일반 신도의 출입이 제한되고 있어서 직접 보지는 못하였다.


옛날에 통도사와 해인사, 그리고 돌구멍절에서 수행을 하고 계시던 세 분의 도반스님이 한자리에 모여 각자의 절을 자랑하게 되었다고 한다. 제일 먼저 통도사 스님이 "우리절은 법당문이 어찌나 큰지 한 번 열고 닫으면 그 문지도리에서 쇳가루가 1말 3되나 떨어진다"고 하며 은근히 절의 규모를 법당 문 크기에 빗대어 자랑을 하셨다. 이어 해인사 스님이 "우리 해인사는 스님이 얼마나 많은지 가마솥이 하도 커서 동짓날 팥죽을 쑬때는 배를 띄워야 저을 수 있다." 고 하며 절의 규모를 큰 솥이 있음을 자랑하였다고 한다.


두 스님의 자랑을 듣고 있던 돌구멍절 스님은 "우리 절 뒷간은 그 깊이기 어찌나 깊은지 정월 초 하룻날 볼일을 보면 섣달 그믐날이라야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라고 자랑을 하여 한바탕크게 웃었다는 아야기가 전한다.


앞으로는 중암암 석문이 보이고 좌측으로는 삼층석탑, 극락굴, 삼인암 등을 갈 수 있는 계단이 있다.

중암암 석문

석문을 지나 바로 보이는 요사채. 스님께서 수행하시는 공간으로 이 곳을 지나야 그 유명한 해우소를 볼 수 있다.

대웅전을 지난 아래로 조금 가면 용왕각이 있다.


중암암에는 볼거리와 이야기거리가 참 많다. 중암암 인근은 삼국을 통일한 김유신 장군이 수련한 곳으로 알려져 있으며 수련 당시 장군이 마셨다는 장군수도 있다. 세살 먹은 어린이가 흔들어도 흔들린다는 건들바위, 만년을 살았다는 만년송, 우리나라에서 가장 깊다는 해우소, 아들을 낳게 해주었다는 삼인암, 그리고 원효대사가 수행했다는 극락굴 등 수없이 많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깊다는 해우소를 제외하고는 앞에서 말한 능성재로 올라가는 길변에 위치해 있다. 가강 대표적인 문화재이고 가장 먼저 마주치는 것이 ​3층 석탑과 석등(石燈)이다. 이 중 3층 석탑은 창건 당시에 건립된 것이라고 하는데 높이 3.7m이다. 석등은 높이 1.2m의 장방형으로 장식이나 기교를 가하지 않은 특이한 석등이다. 이 밖에도 도괴된 부도 1기가 있다.

석탑 바로 뒤에는 극락굴이 있다. 극락굴은 말이 굴이지 실상은 모여있는 거대한 바위 사이의 쪼개진 틈을 말한다. 사람 하나 겨우 들어갈 정도의 입구는 나름 재미와 쾌감을 준다. 말 그대로 극락을 다녀온 기분이다. 중암암을 가면 이 극락굴을 꼭 지나가 보라고 권하고 싶다. 일설에 따르면, 조강지처가 아닌 소위 세컨드는 이 극락굴을 절대 빠져나갈 수 없다는 속설이 있다고 한다.

​​

극락굴이라 적혀 있는 이곳은 김유신 장군이 심신을 단련했다는 곳이기도 하다. 삼국통일의 큰 공을 세운 김유신 장군이 17세(611년, 진평왕 28년) 화랑일 때 백제·고구려가 신라의 강토를 침범하는 것을 보고 비분강개해 적을 평정할 뜻을 세우고 홀로 중악(지금의 팔공산) 석굴에 들어와서 산신께 지극정성으로 기도하자 피갈선인(被褐仙人)이 나타나 신검과 비법을 전수해줘 김유신은 마침내 큰 대업을 이루었다는 그곳이다.

삼층석탑 뒤로 극락굴 입구가 보인다. 아래 사진을 보면 더 확실해진다.

극락굴 안에 들어오면 ....


극락굴을 나와 조금 더 올라가면 둥그런 사발을 엎어 놓은 듯한 건들바위가 있다고 한다. 하지만 비슷해 보이는 바위가 많아 정확하게 어느 것인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건들 바위에는 전설이 깃들여 있다. 옛날 한 승려가 참선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큰 소리가 나서 밖으로 나가 보니, 큰 바위가 암자로 굴러 떨어지려고 하므로 급히 법당에 들어가서 기도를 드리자 바위가 떠올라 훨씬 뒤의 안전한 자리로 옮겨 앉았다고 한다.​

건들바위로 추정되는 바위 옆에도 사람 하나 드나들기에 딱 좋은 구멍이 있으니 이 구멍을 지나게 되면 만년송을 만나게 된다. 이 만년송에서 맺어진 인연은 만년이 간다고 하여 많은 가족, 연인들이 이곳에서 손을 잡고 후생의 인연도 이렇게 같이 할 수 있도록 이 만년송앞에서 경건히 기원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배낭을 메고는 지나갈 수 없을 정도로 좁은 공간이다. 베낭을 한 손에 쥐고 옆으로 몸을 돌려 겨우 통과했다.

만년송


건들바위와 만년송이 있는 곳의 맞은 편 그리고 중암암 법당 바로 뒤 봉우리에 큰바위 3개가 나란히 놓여 있는데, 이것이 삼인암이다. 삼인암은 옛날 어느 처녀가 자식이 귀한 집에 시집을 갔으나 아이를 낳을 수가 없어 효염이 있는 약과 정성을 다하였지만 대를 잇지 못하여 안타까워하고 있던 어느날 스님이 그 소식을 듣고 정성을 드릴 장소로 현재 삼인암이 있는 곳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부인은 이곳에서 정성을 드려 삼형제를 낳았다고 한다.

삼인암

삼인암에서 바라본 풍경


만년송 조금 아래에는 김유신 장군이 수련을 하며 기를 받았다는 전설이 있는 10평 남짓한 공간이 있다고 해서 찾아보았다. 정확한 표시가 없어 자신은 없지만 만녕송과 삼인암보다 조금 아래에 있지만 수평적으로는 두 곳의 중간 즈음에 위치한 아마 아래 사진의 장소가 아닐까 한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김유신의 전생은 고구려에서 점을 잘 치기로 이름난「추남(楸南)」이었다고 한다. 일찌기 고구려의 국경에 거꾸로 흐르는 물이 있기에 기이하게 여기고 왕은 추남을 불러 연유를 물었다. 추남은「왕비가 음양의 도(道)를 역행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왕비가 크게 노하여 요망하다 하고 시험을 하여 틀리면 중형에 처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쥐 한 마리를 함 속에 감추고 이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추남은「이것은 쥐인데 그 수가 여덟 마리입니다」하였다. 한 마리를 여덟이라 하니 틀리다고 추남을 죽이고 쥐의 배를 갈라 보았다. 추남은 죽으면서 원(願)을 세우기를「내가 죽으면 대장이 되어 반드시 고구려를 멸하리라」하였다.

그날 밤 왕의 꿈에 추남이 신라의 선현공(舒玄公) 부인 품속으로 안기는 것을 보고 신하와 의논하여 김유신을 죽이기로 하였다. 그 후 자객 백석 (白石) 을 보내어 김유신을 꾀어내어 고구려로 가던 중, 현 은해사 산중의 중암암에서 하룻밤을 묵을 때, 세 여신이 나타나 김유신을 구해 주었던 것이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 후, 흥덕왕 9년 (834년) 이곳에 사찰을 별도로 창건하고 중암암이라 하였고, 김유신을 흥무대왕으로 추존하였다. ​


김유신 장군이 수련했을 것으로 생각되는 장소.(완전히 개인적인 추론입니다.)

위 장소 옆으로은 계단이 있는데 이 길은 운부암으로 통하는 길이라고 표시되어 있었다.



건들바위와 만년송으로 가기 전에 장군수를 알리는 이정표는 확인하였지만 찾지는 못했다. 자료에 따르면 깎아 세운 듯한, 높이가 두 길이 넘는 암벽에서 흘러나온 물이 고이는 석간수가 장군수다. 삼국을 통일한 김유신 장군이 17세 화랑이었던 시절 이곳에서 수련하며 마셨다는 전설이 있는 약수이다.

장군수와 관련하여 재미나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신라시대에 창건한 중암암은 어느 해부턴가 원주스님 한 분만 절을 지키게 되었다. 어느 해 겨울 이곳에는 예년에 볼 수 없었던 큰 눈이 내려 팔공산 주위를 오통 설원 천지로 만들었다. 모든 길이 막히고 달빛마저 묻혀버린 듯 보이는 것이라고는 하얀 눈뿐이었다. 원주스님은 괴이한 일이라 생각했으나 별다른 도리가 없어 불경만 외우고 그날그날을 보내고 있었다. 더구나 날씨마저 혹한이라 눈이 녹기는커녕 오히려 얼음장처럼 단단하게 굳어지기만 하였다. 이렇게 며칠을 보낸자 큰 문제가 닥쳤다. 쌀독이 비어가고 있는 것이었다.

원주스님은 이 모든 것이 부처님의 뜻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는 마음을 가다듬고 조용히 합장을 하였다.

“대자대비하신 부처님, 이제 속세에서 할 일은 끝난 것이옵니까? 만약 그러시다면 부름에 따르겠습니다.”

모든 것을 체념하고 속으로 열심히 기도를 하고 있는 데 난데없이 산이 쩌렁쩌렁 울리는 호랑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이어서 문살을 핥는 발톱소리가 요란하게 정적을 깨뜨렸다. 

원주스님은 체념하는 마음으로 조용히 문을 열었다. 금세 덮칠 줄 알았던 호랑이가 넙죽 엎드려 꼬리를 흔드는 것이었다. 실로 황소만큼 큰 짐승이었다. 어이없는 사실에 원주스님은 그 자리에 장승처럼 굳어있을 뿐이었다. 호랑이는 무언가 이상한 소리를 내다가 드디어는 짜증스럽게 옷자락을 물고 당기는 것이었다. 그대로 끌려갔다. 법당 동쪽에 이상하게도 눈이 쌓이지 않은 곳이 있었다. 그곳까지 안내하고는 홀연히 사라지고 말았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호랑이가 물지 않은 사실도 기이하지만 이곳까지 끌고 온 사실도 이상한 일이었다. 필시 무슨 사연이 있는 것일까?

원주스님은 사방을 훑어보았다. 달빛이 눈에 부셔 사방은 대낮처럼 밝았다. 참으로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바로 서있는 뒤편 바위 앞에 쌀이 놓여져 있지 않는가. 하루 분은 족할 것 같았다. 원주스님은 그 자리에 부복하여 부처님의 뜻이라 생각하고 감사를 드렸다. 다음날에도 손가락 크기의 구멍에서 쌀이 흘러 나왔다. 매일같이 일정한 양이 흘러 나왔으며 원주스님은 구멍에서 흘러나오는 쌀로 지루하고 추운 겨울을 이겨내고 있었다.

세월은 흘러 입춘 무렵이 되었다. 하루는 남루하게 차려입은 스님 한 분이 찾아왔다.

“저는 태백산 암자에서 수도하던 중이온데 지난겨울 내린 눈으로 인해 암자를 잃었습니다. 몇 달간만 쉬어가게 해주십시오.”

​우선 식량이 걱정되었으나 하루 분이라도 계속 구할 수 있으니 부족한 대로 나누어 먹으면 될 것이므로 불제자로 거절할 수 없어 쾌히 승낙하고 같이 생활하게 되었다. 다음 날 아침 바위구멍 앞으로 가니 어제까지보다도 많은 쌀이 흘러나와 있었다. 분명 두 사람 분이었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뒤 길을 잃고 헤매던 사냥꾼 몇 사람이 또 찾아왔다. 바위구멍은 어찌 알았는지 조금의 빈틈도 없이 사람의 숫자에 맞추어 쌀을 내놓는 것이었다. 이튿날 사냥꾼이 떠난 후에는 여느 때와 같이 두 사람 분이 흘러나왔다.

원주스님보다는 손님으로 눌러앉은 스님이 더 신기하게 여기고 있었다. 한 달쯤 지났을까. 객승이 드디어 일을 그르치고 말았다. 조금 떨어진 산채로 숨어 들어가 팔공산을 무대로 온갖 못된 짓을 골라하는 산적을 찾아간 것이었다.

“원주스님을 처치하고 암자를 차지하면 평생 먹을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니 아예 산채를 그리 옮기는 것이 어떻소?”

객승이 험상궂은 두목 앞에서 의기양양하게 그 동안의 사실을 상세하게 설명하고 거사를 할 것을 종용하였다. 처음에는 산적들이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팔공산 일대라면 손바닥을 펴놓고 그림을 그리라고 해도 다 그릴 것인데 그 암자에 그런 신기한 바위가 있으리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쑥 찾아온 중이 너무나 진지하게 그리고 수차 강조를 하니 속는 셈 치고 따라가 보기로 했다. 틀림없이 바위 구멍에서 쌀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신이 난 산적 떼는 승방으로 들어가 원주스님의 목을 자르려 하였다. 순간 마른하늘에 번개가 치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객승이 낙뢰에 맞아 숨지고 말았다. 그리고는 집 채 만한 바위덩이가 나머지 산적들을 내리덮을 듯 공중으로 뜨는 것이었다.

“아니옵니다. 제가 이들을 개과천선 시키겠습니다.”

원주스님은 두 손으로 바위를 서너 칸 뒤로 물러놓았다. 그 바위가 바로 건들바위로 중암암 뒤쪽에 있다. 그 후 불제자가 된 산적 중에 한 사람은 원주스님의 힘의 원천이 무엇일까 궁금하게 생각한 끝에 원주스님의 뒤를 밟기 시작했다. 그 날도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원주스님은 석굴을 지나서 양 200m 서쪽에 위치한 약수터에 물을 마시러 간 것이었다.

“아, 저것이로구나.” 확신에 찬 모습으로 그 물을 계속 마시던 중 역발산과 같은 힘이 솟구치게 되었다. 힘을 주체할 수 없게 된 산적은 “나에게 덤빌 자는 덤벼보아라.” 하며 아름드리나무를 송두리 채 뽑아들고 지나가는 행인을 때려죽이는 등 못된 일을 일삼았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원주스님이 출타하고 없는 틈을 타서 온 절간의 스님들을 깨워 “나를 따르라, 내가 이 곳의 주인이다.” 하며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소란을 피웠다. 그리고는 바위구멍 앞으로 가서 구멍을 더 크게 만들면 쌀이 더 많이 나오리라 여겨 막대기로 쑤시기 시작하자 꽝 소리와 함께 난데없이 물줄기가 쏟아져 그 산적의 눈을 쳐서 죽여 버렸다.

그 후 그 구멍에서는 쌀 대신 물만 교교히 흐르고 있으며, 장군수라 불리던 약수터는 인간을 어리석은 곳으로 유혹한다고 하여 묻어버렸다고 한다.​


 팔공산 은해사와 중암암을 찾아서 ....1) 은해사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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