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사진/경남

통도사 17암자 순례 9) 옥련암, 백련암 그리고 사명암

산풀내음 2019. 10. 24. 08:58

13. 옥련암

옥련암에 들어서 눈에 처음 들어온 모습은 약수가에서 물을 담는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부부로 보이는 두 분이 적어도 30여 통이 물통을 가져와 쉴 틈 없이 물을 담고 차에 옮기는 것이었다. 조금 있으니 또다른 분들이 오셔서 물을 담기 위해 물통을 차에서 내렸다. 조심스럽게 다가가서 이것이 옥련암의 유명한 '장군수'이냐고 물었더니, 장군수인지는 모르겠고 이곳 물이 통도사 내에서 가장 맛있다고 하신다. 자료에 따르면 장군수는 메워져 없어졌다고 하던데라고 생각하며 1200 아라한이 모셔진 큰빛의 집으로 발길을 옮겼다.

이곳이 장군수인가??? 한 번에 사람들이 밀린 것은 아니지만 끊임없이 사람들이 온다.


공민왕 23년(1374) 쌍옥대사가 창건하였으며, 철종 8년(1857)에 호곡 청진 두 대사가 중건하였다. 사찰 내에 전하는 이야기로 옛날 이 옥련암에 ‘장군수’라는 우물이 있었다고 한다. 이 장군수를 매일 마시는 옥련암 스님들은 힘이 굉장히 세어서 큰절의 스님들이 당하지를 못했다. 하루는 큰절의 스님들이 가만히 의논하여 몰래 장군수 우물을 메우고 그 물길을 딴 곳으로 돌렸다. 그 후부터는 옥련암에는 힘센 스님들이 나오지 않았다고 전한다.

현재 옥련암은 법당을 비롯하여 무량수전과 요사가 자리하고 있으며, 대부분 현대에 조성되었다. 가운데 건물은 ‘큰빛의 집’이라는 한글 현판이고, 주련도 한글로 한 것이 특징이다. 큰빛의 집 안에는 비로자나불을 주불로 하고 부처님 제자 1200아라한을 모셨는데, 1200아라한은 중요무형문화재 제108호 목조각장 박찬수씨의 작품이다. 무량수전의 후불탱화도 목조각품으로, 그 세밀함에 대단한 공력이 느껴진다.

비로자나불과 1200아라한

무량수전에 모셔진 아미타부처님


14. 백련암

옥련암과 밭을 사이에 두고 마주한 암자가 백련암이다. 두 곳 모두 공민왕 23년(1374)에 창건됐다. 월화대사가 백련암을, 쌍옥대사가 옥련암을 창건했다. 월화대사가 창건한 백련암은 인조 12년(1634) 현암대사에 의해 중건되었다. 법당의 현판은 백련사라고 하였으며 대한제국 말기에는 남방의 선찰로써 유명하였던 곳이다. 

광명전. 백련암 주불전과 요사채 사이에 있는 계단을 조금 올라가면 나온다.


15. 사명암

사명암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6년 전 1573년 창건했다. 사명대사는 이곳에 모옥(茅屋)을 짓고 수도하면서 통도사 금강계단 부처님 진신사리를 수호했다. 대사는 왜구의 침탈을 우려하여 진신사리를 2과로 나눠 스승이 계신 묘향산에 보냈는데 휴정은 묘향산 역시 안전하지 못하므로 통도사 금강계단을 잘 수호하여 모시라고 되돌렸다. 이에 1과는 금강계단에 다른 1과는 태백산 갈반지(葛盤地)에 모셨으니 오늘날 정암사 적멸보궁이다. 사명대사를 기리기 위하여 대사의 법명으로 가람 이름을 붙였고 지금도 사명암의 주불전인 극락전 옆에 있는 영각에는 사명대사의 진영(眞影)이 모셔져 있다.

영각

영각에 모셔져 있는 사명대사 진영


사명암은 비로암 못지않게 아름다운 정원을 가지고 있는 곳이다. 해탈문 등과 함께 연못에 어우러진 일승대의 모습은 장관이라 할 것이다. 또한 사명암으로 올라오는 소나무 숲길은 통도 1경인 무풍한송로 못지 않다.


사명암의 전각으로는 아미타부처님을 모신 극락보전과 사명대사를 모시고 있는 영각 그리고 칠성전, 요사채 등이 있다.


사명대사는 어떤 분인가?

1544년(중종 39) 현재 경상도 밀양에서 임수성(任守成)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법명은 유정(惟政), 호는 사명당(四溟堂) 또는 송운(松雲). 일본에서는 송운대사로 알려져 있다. 어려서부터 당대의 문장가로부터 사서경전을 수학하는 등 문재를 떨치다가 1558년에 어머니가, 이듬해 아버지가 별세하자 김천 직지사로 출가했다. 18세 되던 1561년(명종 16)에 승과(僧科)에 합격하고 당대의 쟁쟁한 문사들과 교유했다. 1575년(선조 8) 묘향산으로 서산대사(西山大師) 휴정(休靜)을 찾아가서 제자가 됐다. 1592년 일본이 조선을 침공하자 스승 휴정을 도와 승병을 일으켰다.

1592년(선조 25)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서산대사 휘하에서 각 지역의 승병을 모집하고 선봉이 돼 호국에 나선다. 평양을 탈환하기도 하고 권율과 합세해 왜군을 격파한다. 전쟁 중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를 적진에서 만나 강화 담판을 벌이기도 했다.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최측근 장수인 가토 기요마사와 나눈 필담(筆談)은 희대의 걸작이다.

임진왜란 발발 2년 후인 1594년 일본 지휘관 가토 기요마사는 전시 중에 자신을 찾아온 사명대사에게 “조선에 어떤 보배가 있는가.”라고 묻는다. 이에 사명대사는 “우리나라에선 당신의 머리를 보배로 여기고 있다. 그러니 보배는 일본에 있다.”라고 거침없이 답한다. 

​사명대사의 대담한 발언과 칼날 같은 선기에 가토 기요마사는 움찔했다. 그리고 이 명언은 일본에도 널리 퍼져 사명당이 포로 석방을 위해 일본에 갔을 때 일본인들이 "이 사람이 보배 이야기를 했던 그 화상인가?"라고 입을 모았다고 한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인 1604년 2월에는 조정에서 선조가 내린 강화사절단 수장으로 일본을 방문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시대가 끝나고 일본을 통일한 도쿠가와가 조선에 화친정책을 펼치자 조·일간 전후 처리문제를 협상하기 위해 사절로 간 자리였다.

​​

이때에도 일본의 오만을 납작하게 만든 여러 일화들이 있다.

사명대사가 일본에 사절단으로 입국할 시 일본에서 높은 지위의 우두머리가 "영험하다던데 어디 시험 좀 해볼까?"라는 생각에서 항구에서 궁궐로 오는 길에 1만여 자가 넘는 글씨가 빼곡히 쓰인 병풍을 쭉 세워 놓고 사명당을 가마를 태운 다음 그 병풍 옆을 빠르게 지나가게 했다. 궁궐에 오자 일본 최고위 인사는 "사명당께서 오셨구려. 어디 오시는 길에 병풍이 있던데 보았소?"라고 하자, 사명대사는 병풍 속 글의 첫글자와 마지막 글자까지 모든 글귀를 하나도 빼놓지 않고 밤새도록 좔좔 읊더니 심지어 틀린 오타 하나까지도 완벽히 짚어내었다고 한다.

이에 화가 난 일본인은 사명대사에게 목욕을 권하면서 그곳에 독사들을 가득 풀어놓았다. 하지만 사명대사는 태연하게 염주를 ​​탕 안에 던져 넣었더니 독사들이 다 도망가서 편안하게 목욕하고 나오셨다. 이것으로는 사명대사의 도력을 이길 수가 없다고 생각한 일본인은 최후의 수단을 강구한다. 바로 무쇠로 만든 방에 사명대사를 자게하고 이곳에 불을 집혀 태워 죽일려고 한 것이다.

사명대사는 "이놈들이 역시나..." 하면서 "얼음 빙(氷)"자와 겨울 동(冬)자를 쓴 부적을 천장, 벽에다 붙여놓고 명상에 잠겼다. 다음날 일본인들이 "이쯤 되면 지도 못 견디고 죽었겠지."라고 생각하면서 문을 열어봤더니, 사명대사의 방에는 고드름이 얼어있고 사명당은 "어 춥다. 너희 왜놈들은 먼 곳에서 온 손님이 자는데 불도 안 지피느냐?"라고 했다.

이후 강화를 맺고 포로 3천 5백 명을 데리고 이듬해 돌아와 가의대부(嘉義大夫)의 직위와 어마(御馬, 임금이 타던 말)를 하사받았다. 64세에 세속의 일을 정리하고 해인사로 내려갔다가 1610년(광해군 2) 67세로 법문했다.






 통도사 암자순례

http://blog.daum.net/gmania65/16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