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12월/12월 1일

국산승용차 1호 ‘포니’ 생산 개시

산풀내음 2016. 10. 21. 16:21

197512 1,

국산승용차 1포니생산 개시

 

현대차의 첫 기술 협력선은 포드로 당시 포드는 한국에 진출할 목적으로 여러 협력회사를 물색하고 있었는데 정주영 회장의 자동차지식을 보고 바로 계약했다고 한다. 포드는 자본참여와 경영지도를 원했지만 정주영 회장은 부품만 공급해주면 알아서 하겠다며 경영에 대한 간섭은 거부했다.

1968 6월에 기술도입계약을 끝내고 11월에 코티나를 시작으로 1969 5월에는 고급 중형 세단 포드 20M, 트럭 등을 도입 생산하면서 재미를 보던 중에 1973년 포드와 합작투자 계약이 결렬되게 되었다.

 

포니 이전 포드와 제휴하여 생산한 승용차와 상용차 들

 

더구나 정부에서 자동차육성계획을 발표하는데 그 내용은 2천 달러 이하의 국민차를 개발하고 73%의 국산화 계획을 제출하지 못하는 회사에게는 부품수입에 필요한 외화를 쓰지 못하게 하는 조치였다. 이는 자동차회사들의 부품수입으로 수 많은 외화가 유출되느라 정부가 결정을 내린 것이었다.

 

물러날 곳이 없던 현대자동차는 독자적인 고유모델이 있어야 함을 깨닫고 고유모델 개발을 추진하게 된다. 하지만 당시 국내시장은 연간 승용차 수요가 2만대 미만인데다 자본금 17억짜리 회사가 투자금 300-400억 원이 넘는 개발 및 건설비용, 5만대는 팔아야 수지타산이 맞는 엔진공장 건립 등 누가 봐도 가망성이 없는 무모한 계획으로 반대의견이 거셌으나 이미 자동차와 엔진 국산화에 마음을 굳힌 정주영회장의 결단으로 독자모델 개발을 추진하게 된다.

 

 

프로젝트를 시작하면서 현대의 런던사무소에서 이탈리아에 가면 자동차를 개발해 주는 업체가 많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은 정세영 사장은 1973년 봄 이탈리아로 건너가 디자인을 이탈리아인에게 맡겼고, 엔진, 트랜스미션, 액슬 등은 일본 미쓰비시와 기술제휴를 했다.

국민차 개념을 위해 5인승을 기본으로 4도어해치백, 2도어 쿠페로 차체를 디자인하고 미쓰비시에서는 1.3L 80마력의 새턴엔진과 랜서의 샤시, 4단 수동변속기를 들여왔다. 이렇게 시작한 개발은 1 6개월 만에 1974 10월 완성돼 당해 열린 55회 이탈리아 토리노 모터쇼에서 첫 선을 보였다.

 

기아의 브리사와 GM코리아의 카미나 등의 경쟁차종이 있었지만 국산화율 90% 1975 12월 울산공장에서 50대를 시작으로 본격 생산된 포니는 1976년에는 1726, 1977 25천대, 1978년에는 5만대로 한국의 도로는 포니 물결로 넘쳐나게 되었다.

, 1976 7월에는 에콰도르에 5대의 포니를 시작으로 중동지역에 1천 여대를 비롯해 칠레, 코스타리카, 영국, 네덜란드, 벨기에, 그리스 등에 소량을 수출했고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다양한 기후에 맞는 자동차를 개발해야 한다는 노하우도 쌓게 된다.

 


 

비록 국내에서지만 큰 인기를 바탕으로 4도어 세단만이 아니라 3도어(1979), 왜건(1979), 픽업(1976)으로 가지치기를 하고 1400CC 엔진과 자동변속기 등을 장착했다.

포니는 한국자동차공업이 외국자동차 회사의 기술종속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준 의미 외에도 초기 마이카 시대를 열어 80년대 폭발적인 자동차시장의 형성에 교두보를 마련했고 한국자동차수출 시대를 개막한 작은 영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