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12월/12월 1일

영조가 사도세자를 위해 쓴 묘지문, 250년 만에 공개

산풀내음 2016. 10. 22. 00:23

199912 1,

영조가 사도세자를 위해 쓴 묘지문, 250년 만에 공개

 

조선 영조가 뒤주 속에 갇혀있다 비운의 생을 마감한 아들 사도세자를 위해 쓴 묘지문이 250년만에 공개됐다. 지금까지 사도세자의 명복을 빌기 위해 쓴 글로는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 작품이 조선왕조실록과 정조 개인문집인 「홍재전서」에 전문이 실려 전해져 오고 있었다. 원래는 장헌세자이었지만 부왕인 영조가 아들을 죽인 후에 올리 시호가 사도세자이다. 사도세자(思悼世子)서럽게 죽은 세자를 애도하다라는 뜻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은 12월 이달의 문화재 전시품목 중 하나로 지난 1968년 서울 동대문구 휘경동 거주 이종만씨가 기증해 보관해오고 있던 영조의 `어제 사도세자묘지문'(御製思悼世子墓誌文) 1일 공개했다.

어제란 임금, 즉 영조가 썼다는 뜻이며 묘지문이란 죽은 이의 행적을 기록한 글로 보통 무덤에 함께 매장됐다. 이 묘지문은 가로 16.7, 세로 21.8, 두께 2.0㎝ 사각형 청화백자 5장에 쓰여있는 것으로 작성일자는 영조 38(1762) 7월로 기록돼 있다.

 

임금이 쓴 묘지문은 통상 실제로는 문장이 뛰어난 학자가 쓰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 묘지문은 "이것은 신하가 대신 쓰는 것은 아니며 내가 누워서 받아 적게 하여 짐의 30년 의를 밝힌 것이니..."라며 영조가 직접 작성한 것임을 밝히고 있어 사료적 가치가 대단히 뛰어난 것으로 평가된다.

 

이 묘지문에서 영조는 아들 사도세자가 성군이 될 것으로 기대했으나 "난잡하고 방종한 짓"을 배워 타일렀으나 "제멋대로 언교를 지어내고 군소배들과 어울리니 장차는 나라가 망할 지경에 이르렀노라"면서 왜 아들을 뒤주에 가두게 되었는지를 토로하고 있다. 미치광이로 변한 아들을 탓하면서도 영조는 아들을 죽게 한 비통한 마음을 곳곳에서 토로하고 있다.

"너는 무슨 마음으로 칠십의 아비로 하여금 이런 경우를 당하게 하는고, 도저히 참을 수 없어 구술하노라. 때는 임오년 여름 윤5월하고도 21일이라"

 

이 묘지문에서 충격적인 내용은 영조가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었던 것이 정말 아들을 죽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훈육하기 위해서였다는 고백. 즉 영조는 이 묘지문에서 "강서원에 여러 날 (뒤주를) 지키게 한 것은 어찌 종묘와 사직을 위함이었겠는가...진실로 아무 일이 없기를 바랐으나 9일째에 이르러 네가 죽었다는 망극한 비보를 들었노라"며 원통해 하고 있다.

 

이런 언급은 지금까지 베일에 가려진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한 영조의 역할과 관련, 매우 중요한 기록으로 평가되고 있다. 한편 사도세자 죽음을 둘러싼 학술 단행본으로는 지난해 푸른역사에서 나란히 출간된 박광용 교수의 「영조와 정조의 나라」와 이덕일씨의 「사도세자의 고백」이 있다. (연합뉴스 1999.12.1.)

 

 

[ 어제 사도세자묘지문 ]


 

어제지문 유명조선국 사도세자 묘지. 사도세자는 이름이 훤이고 자가 윤관으로 영조 즉위 을묘년(1735) 121일 영빈의 아들로 탄생하였다. 나면서부터 총명하였고 자라면서는 글월에도 통달하여 조선의 성군으로 기대되었다. 오호라, 성인을 배우지 아니하고 거꾸로 태갑의 난잡하고 방종한 짓을 배웠더라. 오호라, 자성하고 마음을 가다듬을 것을 훈유하였으나 제멋대로 언교를 지어내고 군소배들과 어울리니 장차는 나라가 망할 지경에 이르렀노라.

 

② 아! 자고로 무도한 군주가 어찌 한둘이오 만, 세자시절에 이와 같다는 자의 얘기는 내 아직 듣지 못했노라. 그는 본래 풍족하고 화락한 집안 출신이나 마음을 통제치 못하더니 미치광이로 전락하였더라. 지난 세월에 가르치고자 하는 바는 태갑이 일깨워주는 큰 뉘우침이었지만, 끝내는 만고에 없던 사변에 이르고, 백발이 성성한 아비로 하여금 만고에 없던 짓을 저지르게 하였단 말인가? 오호라, 아까운 바는 그 자질이니 개탄하는 바를 말하리라. 오호라 이는 누구의 허물인고 하니 짐이 교도를 하지 못한 소치일진데 어찌 너에게 허물이 있겠는가? 오호라, 13일의 일을 어찌 내가 즐기어 하였으랴, 어찌 내가 즐기어 하였으랴. 만약 네가 일찍 돌아왔더라면 어찌 이런 일이 있었으랴.

 

③ 강서원에서 여러 날 뒤주를 지키게 한 것은 어찌 종묘와 사직을 위한 것이겠는가? 백성을 속이는 것일지니라. 생각이 이에 미쳐 진실로 아무 일이 없기를 바랐으나 9일째에 이르러 네가 죽었다는 망극한 비보를 들었노라. 너는 무슨 마음으로 칠십의 아비로 하여금 이런 경우를 당하게 하는고. 도저히 참을 수 없어 구술하노라. 때는 임오년 여름 윤5월하고도 21일이라. 이에 다시 예전의 호를 회복하게 하고 시호를 특별히 하사하여 사도라 하겠노라. 오호라, 30년 가까운 아비의 의리가 예까지 이어질 뿐이니 이 어찌 너를 위함이겠는가? 오호라, 신축일의 혈통을 계승할 데 대한 교시로 지금은 세손이 있을 뿐이니 이는 진실로 나라를 위한 뜻이니라.

 

723일 양중 중랑포 서쪽 벌판에 매장하노라. 오호라, 다른 시혜 말고 빈에게는 호를 하사하여 사빈이라고 하는 것으로만 그치노라. 이것은 신하가 대신 쓰는 것이 아니며 내가 누워서 받아 적게 하여 짐의 30년 의리를 밝힌 것이니, 오호라. 사도는 이 글월로 하여 내게 서운함을 갖지 말지어다. 세자는 임술년(1742)에 학문에 들어가고 계해년(1743)에 관례를 올리고 갑자년(1744)에 가례를 올려 영의정 홍봉한의 여식이자 영안위 주원의 오대손인 풍산 홍씨를 맞아들였다. 빈은 22녀를 두었는데, 첫째가 외소세손이며 둘째도 곧 세손으로 참판 김시목의 여식이자 부원군의 5대손인 청풍 김씨와 가례를 올렸다.

 

⑤ 장녀 청연군주, 차녀 청선군주가 있으며 측실로 또한 31녀의 자제를 두었다. 승정 기원후 135년 임오(1762, 영조 38) 7월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