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12월/12월 2일

나폴레옹 황제 대관식

산풀내음 2016. 10. 23. 10:29

180412 2,

나폴레옹 황제 대관식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Napoléon Bonaparte, 1769. 8. 15-1821. 5. 5) 1804 12 2일 교황 피우스 2세가 참석한 가운데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황제 대관식을 가졌다. 프랑스 제1제정(帝政)이 본격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나폴레옹은 1804 5 28일 제정을 선포하고 황제에 오른 바 있다.

 

나폴레옹은 코르시카의 아작시오 태생이다. 10살이 되던 1779에 본토로 가 유년사관학교, 뒤이어 정식으로 사관학교로 진학하여 졸업했는데 졸업동기 58명 중 42등으로 졸업, 겉보기엔 상당히 안 좋은 성적이지만 사실은 미친 듯이 월반해서 무려 4년 월반 졸업이었다.

 

1785 포병 소위로 임관 후 별다른 특색 없이 지내다가 1789 프랑스 대혁명이 발발하면서 역사의 격동 속으로 휘말려 들어갔다. 나폴레옹은 자코뱅파를 지지했으며, 이후 고향으로 잠시 돌아갔으나 코르시카 독립운동의 지도자 파울리와 충돌했다. 혁명의 혼란 속에서 독립국가 코르시카를 건설하자는 파울리와 프랑스에 남아야 한다는 나폴레옹의 충돌은 결국 나폴레옹의 패배로 끝나고 나폴레옹은 가족들과 함께 본토로 이주한다.

 

이후 1793의 툴룽 포위전에서 왕당파 반군을 격파하고 이를 지원하러 온 영국 함대를 포격으로 쫓아내는 전공을 세워 혁명전쟁 속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1796 이탈리아 원정군의 사령관이 되어 이탈리아 방면의 오스트리아군을 보이는 족족 격파, 1797년 2 최대 요충지 만토바를 함락하였다. 그 결과 캄포 포르미오 조약으로 오스트리아 세력을 북부 이탈리아에서 밀어내고 전 국민적 영웅으로 떠올랐다. 뒤이어 1798 이집트 원정을 떠나 소기의 성과를 거뒀으나 아부키르 해전의 패배로 호레이쇼 넬슨에게 함대가 괴멸 당하고, 오스만 제국의 선전포고로 중동 방면으로의 진격이 난항을 거듭하였으며, 설상가상으로 본국의 정치상황이 급격하게 돌아가자 1799년 10 이집트를 탈출해 급거 귀국하기에 이른다.

 

나폴레옹은 귀국 직후인 1799 11 9 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를 일으켜 기존 정부를 해산하고 새로운 헌법을 공표한 뒤 1, 2, 3통령을 두었으며 본인은 스스로 제1통령에 취임하였다. 그러나 모든 권력은 제1통령인 나폴레옹에게 있었고 2통령과 3통령은 허울에 불과했다.

 

이후 다시 한 번 이탈리아 원정을 감행, 또 다시 오스트리아를 상대로 대승을 거두고 북이탈리아와 라인강 서쪽 지역에서의 확실한 프랑스 우위를 다졌으며, 1802 영국과 아미앵 화약을 맺고 실로 오래간만의 평화를 프랑스에 가져다 주었다. 이러한 성공을 바탕으로 스스로 종신통령에 취임했으며, 대대적인 내정개혁을 단행하여 상공업 진흥과 조세 및 교육제도 개혁 등을 실시했다.

 

1802 3월 아미앵 조약 (Treaty of Amiens)으로 정해진 유럽의 지도

 

이후 높아진 인기를 바탕으로 1804 국민투표를 통해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올라 나폴레옹 1세가 되었다. 전통적인 서유럽 세계관에서 황제는 로마 제국의 황제와 그 계승자를 의미하는 것이었는데 나폴레옹은 이를 단번에 깨트린 것이다. 나폴레옹의 황제 즉위는 전 유럽의 반발을 불러왔고, 이에 영국은 아미앵 화약을 파기하여 프랑스는 다시 한 번 전쟁에 휩쓸린다. 그러나 트라팔가르 해전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나폴레옹은 전격적으로 오스트리아를 침공, 빈을 함락하고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오스트리아-러시아 연합군을 섬멸하며 최전성기에 달한다. 이후 18061807에 걸쳐 프로이센, 러시아군을 격파하고 러시아와 틸지트 화약을 체결, 전 유럽을 완전히 프랑스의 세력권에 두게 된다.

 


 

하지만 이후 단행한 이베리아 반도 원정이 지리한 장기전으로 흐르고, 영국을 굴복시키기 위해 단행한 대륙봉쇄령이 큰 실효를 거두지 못한 채 오히려 타격만 받자 대륙봉쇄령에 성실히 참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1812 60만 대군과 함께 러시아 원정에 나선다.

 

원정의 첫 발을 내딛은 1812 6월은 폭염이 기승을 부리던 시기였다. 매우 심한 더위로 인해 수많은 병사와 말이 죽고, 낙오자가 속출한다. 우여곡절 끝에 러시아에 도착한 나폴레옹의 군대는 후퇴만을 거듭하는 이상한(?) 러시아군과 마주친다. 정면 대결에선 승산이 없음을 간파한 러시아군은 탄알을 아끼며, 초토전술(焦土戰術)을 구사, 즉 철수하면서 중요시설에 불을 질러 적이 이용할 수 없도록 했다. 1812 9 14, 나폴레옹은 당초 목표였던 모스크바에 입성했지만 이미 모스크바는 잿더미가 된 후였다. 프랑스 본국에서 쿠테타의 조짐이 포착되었다는 소식과 함께 장거리 이동과 식량부족으로 사기와 체력이 고갈된 나폴레옹의 군대는 10월 말 모스크바에서 철수한다. 하지만 철수 도중 곳곳에서 러시아 농민의 게릴라 공격을 받았고, 때마침 시작된 러시아의 겨울은 나폴레옹 군대를 괴롭혔다. 수많은 병사들이 차가운 설원에서 쓰러져 갔다.  64만 명 가운데 살아 돌아온 병사는 2 5천 명에 불과했다.

 

모스크바에 입성하는 나폴레옹 군대

공격을 받는 나폴레옹 군대

퇴각하는 나폴레옹군대

 

이후 1813 전역에서 나폴레옹은 여러 차례 대프랑스 동맹군을 격파했지만 전체적인 열세를 뒤집지 못해 유럽의 운명이 걸렸다는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패하고 재기하지 못한 채 퇴위하여 이탈리아의 엘바 섬으로 유배된다.

1815, 부하들의 도움으로 엘바 섬을 탈출한 나폴레옹은 루이 18가 도망간 틈을 타 황제로 복위하고 전격적으로 선제공격에 나섰으나 블뤼허와 웰링턴의 저항으로 워털투 전투에서 그 뜻이 꺾였다. 이후 미국 망명을 시도했으나 무위로 돌아가고 아프리카의 외딴 섬 세인트헬레나로 유배되었다가 1821 죽었다.

 

Battle of Waterlo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