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12월/12월 2일

장덕수 전 동아일보 부사장 피살

산풀내음 2016. 10. 23. 20:39

194712 2,

장덕수 전 동아일보 부사장 피살

 

1947 12 2일 오후 6 50분경, 우익 민족진영의 최고이론가 설산(雪山) 장덕수가 제기동 자택에서 손님들과 환담을 나누던 중 종로경찰서 소속 경찰관 박광옥과 공범 배희범이 쏜 총탄을 맞고 자택에서 숨졌다. 이때 붙잡힌 배희범, 박광옥 등과 그들의 배후로 지목된 김석황은 모두 한국독립당 소속이었고, 김석황은 한독당 중앙위원이자 국민회의 동원부장, 임시정부 등에도 관여하였다.

 

 

용의자 6명은 장덕수를 암살할 목적으로 1947 8월 창단된 대한혁명단을 조직하였는데 이들은 임정을 절대지지하는 대한학생총연맹의 간부 또는 맹원들이기도 했다. 대한학생총연맹1947 6운현궁에서 발족되었는데 김구를 총재, 조소앙엄항섭을 명예위원장으로 추대하였다. 박광옥종로경찰서의 경사로 근무하는 경찰관이었고, 배희범은 초등학교 교사로 모두 한독당 당원이었다.

 

장덕수(1894-1947)는 황해도 재령군 출신으로 본관은 결성(結城) 호는 설산(雪山)이다. 1912년 일본에 유학하여 와세다(早稻田)대학 정경학부에 입학하여 1916년에 졸업하였다. 1923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오레곤(Oregon)주립대학에 입학했으나 중도에 그만두고, 이듬해 컬럼비아(Columbia)대학에 입학하여 1936년에 박사학위를 받고 졸업하였다. 김성수, 송진우, 김철수 등과 교우하였다.

 

1936년 영국 런던에서, 좌로부터 김성수, 이활, 신성모, 장덕수

 

1947 5부터 제2미소공동위원회 참가 여부를 놓고 김구와 갈등관계에 있었다. 그는 미소공동위원회가 신탁통치를 추진시킨다고 이를 반대하는 이승만이나 김구와는 달리 미소공위에 참석하여 한국인의 견해를 당당히 표명하기 위해서는 미소공동위원회와 협의해야 하다고 주장했다. 한국의 독립에 미국, 소련 등의 강대국의 입김이 배제될 수는 없으며, 이들 강대국을 실력으로 밀어내기는 역부족이라는 것이 그의 견해였다. 그러나 설득은 실패했고, 그는 이 일로 김구와 격렬한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1947 10 18, 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면서 장덕수는 '미소공동위원회에 대해 더는 기대할 것이 없다'고 판단하고 단정 수립 지지로 선회했다. 이어 그는 국제연합(UN)에 호소해 총선거를 실시해야 한다고 판단, 1947 9 김성수와 함께 미국 특사 웨드마이어를 찾아 남한 단독정부 수립의 불가피함을 주장하였다.

 

한독당 내 국내파가 정치이념의 차이 등의 이유를 내세워 한민당과의 합당을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김구, 조완구, 조경한 등은 한민당과의 합당을 추진하였다. 특히 김구는 1947 2 26 3.1절까지 한민당과 한독당의 합당이 거부될 때에는 한독당위원장직을 사퇴하겠다는 초강경자세로 나왔다.

우파정당 통합에서 한민당(한국민주당)은 빠졌는데 우익정당 통합의 일환으로 한국독립당과 한국민주당의 통합 시도에 김성수는 찬성하였으나 장덕수는 반대하였다. 장덕수는 한독당과의 통합하는 것은 당을 통째로 임시정부에 갖다 바치는 일이라며 반대하였다


 

우측은 장덕수 장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