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12월/12월 6일

아일랜드 자유국 선포

산풀내음 2016. 10. 26. 21:03

1922 12 6,

아일랜드 자유국 선포

 

1922 12 6영국·아일랜드 조약(Articles of Agreement for a Treaty Between Great Britain and Ireland)’이 조인됨으로써아일랜드 자유국이 수립됐다. 영국은 남아일랜드 26주에 영국 자치령과 동등한 지위를 보장하고, 아일랜드는 영국 왕실에 충성한다는 내용의 조약이다. 하지만 아일랜드로서는 반쪽의 승리였다.

1920 12 23일 영국 의회가 통과시킨아일랜드 자치법에 의해 남()아일랜드만 이날 자유국으로 홀로 서고, ()아일랜드 9개주() 중 신교도가 다수인 6개주는 여전히 영국잔류를 희망했기 때문이다.

 


 

영국 군대가 가톨릭이 다수인 아일랜드에 상륙한 것은 1170년이지만 분쟁의 역사는 16~17세기에 영국이 아일랜드를 강제 점령하면서 시작됐다. 특히 1649 9월에 영국의 크롬웰은 더블린 북쪽 드로이다를 점령하면서 4,000여 명의 아일랜드 주민을 학살하기도 했다. 영국에서 건너온 신교도 영국인들은 주로 북아일랜드 지역에 정착했다. 종교는 아일랜드를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키워드. 역사적으로 가톨릭이 90% 이상을 차지하는 이곳에 신교세력이 득세하면서 섬은 혼란에 휩싸였다.

 

아일랜드사태는 1801년 영국이 아일랜드를 병합, 영국·아일랜드 연합왕국(United Kingdom)을 탄생시키면서 본격화된다. 이때부터 신앙의 자유와 자치독립을 요구하는 운동이 고조돼 아일랜드 역사는피의 역사로 얼룩진다.

 

1910 에드먼드 레드먼드가 이끄는 아일랜드 의회당영국 하원에 진출하였으며, 이들은 1912년 자치 청원을 의회에 제출하였다. 이에 반발하여 영국과의 합병 유지를 지지하는 얼스터 의용군(Ulster Volunteer Force; UVF)이 창설되었고, 이에 대립하여 자치를 지지하는 아일랜드 의용군(Irish Volunteers)도 창립되었다.

제1 세계대전이 발발한 1914 9월 영국 하원은 아일랜드의 자치를 골자로 하는 아일랜드 자치법을 의결하였다. 그러나 이법의 실시는 전쟁 이후로 연기되었다. 레이먼드는 영국 정부의 약속을 믿고연합국에 가담하여 동맹국과 대항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런 와중에 1916 4아일랜드 의용군’ 1600명이 더블린을 포위, 독립을 요구하는 '부활절봉기'가 일어났다. 페트릭 피어즈가 이끄는 아일랜드 의용군제임스 코놀리가 이끄는 아일랜드 시민군 4 24일부터 30일까지 봉기를 주도하였다. 부활절 봉기는 더블린을 중심으로 진행되었으며 영국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The 1916 Proclamation or Easter Proclamation

 

그리고 영국 정부는 아일랜드의 자치를 위한 조약 이행을 위해 1917-18년에 걸쳐 아일랜드 연석회의를 개최하였지만 의견 차이로 무산되었고, 결국 1919 1월 21 브린이 지휘하는 아일랜드공화국군은 왕립 아일랜드 보안대(RIC) 소속의 경찰 두명을 살해하면서 아일랜드 독립전쟁(Irish War of Independence)이 시작되었다. 독립전쟁은 2면 반 동안 계속되었고 1921 7월 11 휴전하였다. 이 전쟁으로 아일랜드는 아일랜드 자유국북아일랜드가 각각 분리되었다.

 



 

한편 1920년 아일랜드 문제의 해결을 위해 영국이 아일랜드를 남북으로 분리하려 하자 이를 반대하는 저항운동이 아일랜드 전역에서 격렬하게 일어난다. 신교도가 3분의 2를 차지하고 있는 북아일랜드는 가톨릭이 다수인 남아일랜드와의 분리를 원했지만 IRA(아일랜드공화국군)는 분리를 반대했다.

 

아일랜드는 1949 4 18일 영연방으로부터도 이탈해 완전 독립국이 됐지만, 북아일랜드의 앞날은 일부 진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여전히 불투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