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12월/12월 7일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 폴란드에 사죄

산풀내음 2016. 10. 30. 08:25

1970 12 7,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 폴란드에 사죄

 

잔뜩 흐린 하늘에 날씨도 쌀쌀했던 1970 12 7,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는 폴란드의 한 유대인 위령탑 앞에서 애도를 표하다가 갑자기 차가운 대리석 위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과거 나치독일에 상처받은 폴란드 국민들에게 용서를 빌었다. 독일 총리로는 2차 대전 후 25년 만에 처음 폴란드를 방문한 브란트는 국교정상화 조약에 서명한 뒤 바르샤바의 한 유대인 위령탑을 찾은 길이었다.

1943 4 19일에 바르샤바 게토에 거주하던 7만의 유대인들이 나치에 저항하다가 56,000명이 사살되거나 체포된 곳이었다.

 

게토란 중세 이후 유럽 각 지역에서 유태인들을 강제로 격리하기 위해 설정한 집단거주지역을 말한다. 1940년 폴란드를 점령한 나치는 유태인 분리정책을 위해 게토를 세우기 시작했다. 1940년에 폴란드 전역에 300백만 정도의 유태인이 살고 있었는데 나치는 이들을 몇 개의 게토로 분산해서 집단 수용했고, 그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것이 바르샤바 게코였다.

 

Willy Brandt kneels before the Warsaw Ghetto Memorial (Warsaw, 7 December 1970)

 

브란트 총리가 위령탑 앞에 섰을 때 현장에 있었던 주변에 있었던 사람들은 모두 의례적인 사죄 연설이나 추도사 정도를 예상 했었다. 그러나 뒤이어 나온 브란트 총리의 행동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비에 젖은 기념비 앞 콘크리트 바닥에 털썩 무릎을 꿇은 것이었다.

무릎을 꿇은 채 브란트 총리는 눈을 감고서 두 손을 모았다. 그제서야 주변 사람들은 브란트가 독일 국민들을 대표해서 희생된 영령들에게 참회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 소식은 급전으로 전 세계에 타전되었고 세계는 그의 진정한 참회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브란트 총리는 나중에 당시 상황에 대하여 처음부터 그럴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아침에 길을 나설 때 진심을 전달할 수 있을 무엇인가를 표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독일의 숨길 수 없는 악행의 역사를 증언하는 장소에서 나치에 목숨을 잃은 수많은 영령들을 대하는 순간 저는 할 말을 잃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저는 사람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때 할 수 있는 행동을 했을 뿐입니다.”라고 했다.

 

브란트 총리의 이날 사건을 두고 한 언론은 무릎을 꿇은 것은 한 사람이었지만 일어선 것은 독일 전체였다고 압축해 표현했다. 또 다른 언론은 나치와 싸웠던 빌리 브란트 총리는 그 곳에서 무릎을 꿇을 필요가 없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총리는 실제 무릎을 꿇어야 함에도 용기가 없어서 꿇지 못하는 사람들을 대신하여 무릎을 꿇었다라고 극찬을 하였다.

 

브란트의 이처럼 파격적인 사죄는 동방정책과 함께 훗날 독일 통일의 밑거름으로 평가됐다. 하지만 독일인들의 당시 반응은 냉담했다. 국민의 41%적절했다고 했고 48%심했다는 반응을 보였다.

폴란드는 독일이 일으킨 2차 세계대전으로 600만명의 국민과 40%의 국부(國富)를 잃은 피해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