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2월/2월 1일

이란의 종교지도자 ‘호메이니’ 귀국

산풀내음 2016. 12. 5. 21:40

19792 1,

이란의 종교지도자 호메이니귀국

 

 

프랑스에 망명 중이던 이란의 최고 종교지도자 호메이니(Ruhollah Khomeini, 1900~ 1989) 1979 2 1일 에어 프랑스 특별기편으로 테헤란 공항에 내렸다. 1930년대 후반부터 국왕 팔레비의 종교탄압과 서구화 정책에 저항하다가 1964년 추방되어 터키, 이라크, 프랑스 등지에서 망명생활을 한지 15년만의 귀국이었다. 이미 1 16일에는 팔레비 국왕이 독재타도를 외치는 시민들에 쫒겨 해외로 망명한 상태였다.

 

1978년 프랑스 파리 근교의 노폴르샤토에서 이란혁명을 지도한 호메이니

1979 2 1일 귀국하는 호메이니

 

1941년 즉위한 팔레비(Mohammed Reza Pahlavi, 1919-1980)는 강력한 근대화 정책을 펴나갔다. 경제 성장률이 매년 9% 이상을 유지했고, 관개사업과 보건, 교육 사업으로 기근과 질병과 문맹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한편 팔레비는 겉으로는 이란의 현대화를 추진시켰지만, 수십억 달러의 사유재산을 가지고 흥청망청 써댔으며, 자신의 정권 유지를 위해 정치활동을 억압했으며, 고문, 암살, 정치적 위협을 자행하는 비밀경찰조직인 샤바크를 운영하여 이란을 통치했다. 그리고 정교분리로 기존 엘리트층인 성직자들의 권력 참여가 차단된 데다 그들의 지위마저 격하되자 국민의 다수를 이루는 시아파 이슬람교도들은 분노했다.

 

Princess Shams wearing the tiara and earrings for the 1967 coronation. In the picture on the left, she stands next to the Empress, while in the picture on the right she is first

 

열광적으로 귀국을 환호하는 군중 앞에서 호메이니는 팔레비 왕이 임명한 바크티아르 내각을불법으로 선언했다. 2 9일 테헤란 교외에서 호메이니를 지지하는 군인들이 봉기했으며 이틀 뒤 임시정부가 수립됐다. 그 해 말 국민투표를 통해 채택된 이란의 새 헌법은 호메이니에게 최고 정치-종교 지도자의 지위를 부여했다.

 

정권을 장악한 호메이니는 혁명 재판소를 설치하고 밤에 비공개로 진행되는 약식재판을 통해 팔레비 정권의 고위관리들 600명 이상을 총살했다. 또한 호메이니는 이슬람의 율법에 의한 국가 통치를 시작하였다. 즉 서구의 모든 가치관을 전면적으로 부인하고 남녀공학이 폐지됐으며 여성들에겐 차도르를 쓰게 하고, 마약, , 담배, 서양음악은 엄격하게 제한했다. 호메이니는 1300년 전에 계시된 ‘율법의 나라’를 만들고자 했다.

 

이란 현대사의 두 주역은 팔레비 국왕(1919∼1980)과 호메이니(1900∼1989)였다. 1960년대 초 이란 국민의 90%를 차지하는 이슬람 시아파의 최고지도자대 아야툴라가 된 호메이니는 반정부 운동의 선봉에 섰다. 팔레비 정권은 1963년 그를 투옥했고 1년 뒤 강제추방했다. 호메이니는 이라크에 머물며 반팔레비 운동을 계속하였고 호메이니의 영향력이 커지자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은 호메이니를 1978 106일 추방하였다. 호메이니는 터키를 거쳐 프랑스 파리의 교외 노플르샤토에 정착해서 테헤란으로 귀국할 때까지 이란의 반정부 세력을 진두 지휘했다. 호메이니는 프랑스의 한 시골마을에서 정치 지도자로서 육성을 녹음한 테이프를 제작해 이란으로 보냈다. 오로지 목소리만으로 그는 이란 국민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1978 1월 정부가 망명 중인 호메이니를 비판하자 시아파 성지인 쿰에서 항의시위가 발생했다. 카세트테이프에 담긴 호메이니의 육성에 힘입어 전국적으로 시위의 규모는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1978년 말 이란의 상황은 급박하게 전개되기 시작했다. 12월 초 이란 전역에서 종교지도자, 야당, 인권운동가, 학생들이 참여하는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발생했다. 12 10일 ‘애도의 기념일’인 아슈라를 맞아 150만 명이 시위에 참가한 뒤 국면은 정부의 통제를 벗어났다. 시위대들은 호메이니의 대형 사진을 내걸고 팔레비 국왕의 사퇴를 요구했다. 시위 진압 과정에서 수천명이 사망했고 이란은 내전상태로 들어갔다.

 


 

이란 혁명은 팔레비와 호메이니의 운명을 뒤바꾸어 놓았다. 1979 1 6일 팔레비는 휴양을 이유로 이란을 떠났고 1980 7월 이집트서 사망했다. 한편 호메이니는 죽을 때까지 이란의 절대적 통치자로 군림하며 이슬람 혁명의 수출에 힘씀으로써 인접 아랍국가의 지도자들을 전전긍긍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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