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3월/3월 12일

중국 건국의 아버지 쑨원 사망

산풀내음 2017. 1. 9. 20:52

1925 3 12,

중국 건국의 아버지 쑨원 사망

 

중국 건국의 아버지이자 국민당 당수인 쑨원(孫文, 1866. 11. 12-1925. 3. 12) 1925 3 12일 간암으로 북경에서 사망했다. 향년 58세였다. 동지들은 별실에서 대기하고 있었고 부인 쑹칭링(宋慶齡)만이 이 위대한 혁명가를 보냈다. 쑨원은 중국의 혁명을 이끌어 공화제를 창시함으로써 국부로 일컬어지는 혁명가이다.

 

쑨원과 쑹칭링의 결혼사진()

 

중국 혁명의 선도자 ·정치가로서 자는 일선(逸仙)이고, 호는 중산(中山)이다. 공화제 창시자로 국민정부시대에는국부(國父)’로서 최고의 존경을 받았다. 광둥성 향산(香山, 현재의 中山)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14세 때 하와이의 형 쑨메이(孫眉)에게로 가서 호놀룰루의 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 18세 때 귀국하여 서의서원(西醫書院, 의학교)을 졸업(1892)한 뒤 마카오, 광저우 등에서 개업하였다.

 

광저우 의학교에서 삼합회(三合會)의 수령인 정스량(鄭士良)과 알게 되었으며, 홍콩 의학교 재학 때부터 혁명에 뜻을 두어 반청운동에 참가하였다. 중국을 서양과 같은 나라로 개혁하려 한 그는, 포르투갈 영지(領地)인 마카오에서 쫓겨난 뒤부터 본격적인 혁명가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1894청일전쟁 때 미국 하와이에서 흥중회를 조직한 뒤 화교들을 모아, 이듬해 10월 광저우에서 거병하였으나 실패하고 일본으로 망명, 변발을 자르고 양복차림을 하기 시작하였다. 1896년 하와이를 거쳐 런던으로 갔으나 그곳에서 청국공사관에게 체포되고, 홍콩 의학교 때의 스승 J. 캔틀리 등에 의해 구출되어 영문으로런던 피난기를 발표하여 그의 이름과 중국 사정이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영국에 머무르는 동안 견문을 넓힌 그는 삼민주의(三民主義)를 구상하였다.

 

1897년 미국을 거쳐 일본으로 건너가, 미야사키 도텐(宮崎滔天) 등 일본의 지사들과 사귀는 한편, 캉유웨이(康有爲) 등과의 제휴로 필리핀 독립원조를 꾀하였고, 1900년 제2차 거병(후이저우 사건)을 시도하였지만 실패로 끝났다. 그 뒤 1905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일본으로 들어가 8천명에 이르는 유학생들을 천천히 규합한다. 그는 일본 유학생 세력과 힘을 규합해 ‘중국혁명 동맹회’를 만들고, 각종 홍보활동과 조직활동을 서두른다. 또 먼저 귀국한 이들이 각지에서 봉기를 일으킨다. 하지만 번번히 실패한다. 1911 10차 봉기인 황화강(黃花岡) 봉기가 실패하지만 중국은 물론이고 세계적으로 쑨원의 이름은 높아간다.

 

1911 10월 미국의 덴버 시에서 군자금을 모금하던 중 신해혁명의 발발 사실을 알고, 열강의 원조를 기대하며 유럽을 거쳐 귀국하였다. 청조의 몰락은 이제 불을 보듯 뻔했지만, 역시 중국을 삼키려는 서구 제국주의 세력의 움직임도 기민했다이 와중에 쑨원은 상하이에 도착한 지 4일 후인 12 29일 난징에서 열린 선거에서 압도적인 표로 대총통에 당선된다. 1912 1 1일에 쑨원을 대통령으로한 중화민국이 탄생한 것이다.

 

신행혁명 2개월 후인 1911 12월 임시대총통 취임을 앞두고 16년 만에 홍코을 방문한 쑨원(앞줄 오른쪽)

1912년 새해 첫날, 임시 대총통에 취임하기 위해 각 성 대표와 군사고문 등을 대동하고 난징에 첫발을 디딘 쑨원(가운데). 날씨 탓도 있었지만 분위기가 살벌하다.

 

그러나 쑨원은 자신의 정부가 취약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조정으로부터 전권을 위임 받고 있던 북양대신 위안스카이(袁世凱)와 협상을 맺었다. 1912 2 12일 황제는 폐위되었다. 그 다음날 쑨원은 임시총통직을 사임했고, 2 14일 위안스카이가 총통에 취임했다.

 

1912 2 15일 난징에서 쑨원이 임시정부 관원들과 함께 한족의 마지막 왕조였던 명나라의 개국 황제 주원장의 능을 참배하고 있다.

 

그러나 위안스카이는 총통에 만족하지 않고 스스로 황제가 되고자 했다. 그래서 위안스카이는1913 3월 동맹회를 재편하여 국민당을 만들고 또 그 당수로 활약했던 쑹자오런(宋敎仁)을 암살했다. 이 사건을 분기점으로 하여 쑨원과 위안스카이의 협조체제는 붕괴되었다. 이로 인해 제2차 혁명전선이 형성되었고 쑨원은 위안스카이에게 반기를 들게 되었다. 그러나 이 혁명이 실패하자 그는 다시 일본으로 도피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중화혁명당을 창설하고 군벌들이 얽혀 싸우는 틈에 호법운동(護法運動)을 벌여, 광둥을 중심으로 정권수립에 힘을 기울였다.

 

쑨원은 일본과 중국에서 새로운 세 모으기를 지속했고, 장쩨스(蔣介石) 등이 이 모임에 참여했다. 그리고 위안스카이의 야망은 지속될 수 없었다. 광둥 등 남방에서 몰고 간 반원(反袁)은 확장됐고, 그의 지지자였던 군벌들이 하나 둘 손을 놓자 위안스카이는 절망했고, 1916 6 5일 숨을 거둔다.

 

쑨원은 다시 힘을 모았지만 차츰 각 지역에서 군림하던 군벌의 성장으로 인해 좌절할 즈음인 1919년 ‘5.4운동’이 일어났다. 또한 중국에 대한 야심을 불태우던 일본에 대한 경계심도 커갔다. 하지만 쑨원에게는 정치적으로 여전히 어려움이 계속됐다. 그는 국민당은 물론이고 공산당 장교들의 토대가 된 황포군관학교를 세워 힘을 모았다. 학교 내부는 국민당의 실질적 지휘자인 장쩨스가 주역이었지만 서서히 발원하는 공산당의 활동무대이기도 했다.

 

한편 이 당시 쑨원은 1917년 러시아 혁명을 일으켜 집권하게 된 소비에트 정부에 점점 더 눈길을 돌리게 되었다. 소련의 외교관인 아돌프 요페가 1922, 1923 2차례에 걸쳐 상하이로 그를 찾아왔다. 1923년의 방문에서 쑨원과 요페는 공동성명서를 발표했다. 그 내용은 공산체제는 중국에 적합하지 않으며, 소련은 중국에서의 모든 특권을 포기함과 동시에 외몽골 이남지역에 대하여 영향력을 행사할 의사가 없다는 등의 것이었다. 한편 소련의 권유로 중국공산당은 국민당과 협력하기로 결정했다.

 

1922 6월 광둥성 광저우의 대원수부(大元帥府)에서 경호원들과 함께한 쑨원과 쑹칭링(宋慶齡) 부부

 

1923 10월 코민테른의 대표인 미하일 보로딘이 광둥을 방문하며 곧 쑨원의 신임을 얻었다. 1924년초 쑨원은 소비에트 공산당의 조직을 모델로 하여, 상명하달식의 기강이 엄격한 조직으로 국민당을 개편했다. 그의 지시에 따라 국민당은 전당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으로 3명의 공산당원을 선임했고 군관학교(쑨원은 이 학교의 교장으로 장제스(蔣介石)를 임명했음)의 설립을 승인했다.

 

그는 수많은 좌절을 겪으면서 군벌 뒤에 제국주의가 있다는 것과, 인민들과 단결하여 반제(反帝) ·반군벌 싸움을 벌여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러시아혁명을 본받아 국민당을 개조한 뒤, 공산당과 제휴(국공합작), 노동자, 농민과의 결속을 꾀하였다. 그리고 국민혁명을 추진하기 위하여 북벌을 꾀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채혁명은 아직 이룩되지 않았다는 유언을 남기고 1925 3 12일 간장암으로 베이징에서 사망했다.

 

그의 죽음 뒤에 그의 권위에 도전하는 세력도 만만하지 않았다. 그의 사체는 1929년까지 베이징 근처의 비윈사(碧雲寺)에 매장되지 않은 채 안치되어 있다가, 그 뒤 난징으로 옮겨져 중산릉에 매장되었다.

 

쑨원의 장례식() 그리고 4년뒤 자신이 만든 국민당 깃발로 장식한 장례기차를 이용해 남쪽으로 옮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