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3월/3월 17일

고급요정 선운각 마담 정인숙 피살

산풀내음 2017. 1. 14. 16:26

1970 3 17,

고급요정 선운각 마담 정인숙 피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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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AljhYMRTv1Y&t=46s

 

 

눈발이 날리던 1970 3 17일 밤 11시쯤, 코로나 승용차에서 미모의 26세 여인이 목과 가슴에 두 발의 총알을 맞고 숨진 채 그리고 권총에 맞아 신음하고 있는 한 사내가 서울 강변대로에서 발견됐다. 부상당한 사내는 정종욱(당시 34, 정인숙의 오빠)이고 숨진 미모의 여인은 26살의 정인숙이었다.

 

 

 

 

 

 

 

 

단순한 치정살인으로 여겨졌던 이 사건이 갑자기 세인의 관심을 끌게 된 것은 그녀가 고급요정 선운각의 얼굴마담인 데다 수첩에 정·재계 거물 26명의 이름이 적혀있다는 사실이 알려 지면서였다. 게다가 여권발행이 힘들었던 시절에 불법발급 된 복수여권까지 소지하고 있었으며, 최소 장관급 이상만 발급이 가능한 회수여권도 가지고 있었다. 여인은 빼어난 몸매와 뛰어난 화술로 한창 주가가 높았던 요정마담 정인숙이었고 그녀에게는 세 살배기 아들이 있었다.

 

 

 

 

경찰이 정인숙의 집을 뒤져 발견한 수첩과 장부에는 그녀가 관계해 온 것으로 믿어지는 유력인사들의 명단이 적혀 있었다. 거기엔 일시와 장소까지 함께 기록돼 있었다. 대통령 박정희, 국무총리 정일권, 중앙정보부장 김형욱, 경호실장 박종규, 그리고 장·차관과 군 고위장성, 5대 재벌그룹 회장과 거물급 국회의원 등 주요인사 26명을 비롯해서 당시 힘깨나 쓴다는 실력자 수십 명의 이름과 연락처가 적혀 있었다.

 

수사를 담당한 경찰은 오빠인 정종욱을 범인으로 지목, 구속 기소한다. 정인숙의 운전기사를 하면서 동생의 문란한 사생활에 분노해 살해했고 강도사건으로 위장했다고 발표했지만, 사람들은 곧이 믿지 않았다. 오히려 어린 아들의 아버지가 현직 국무총리 정일권이라는 소문만이 난무했다. 범행에 사용된 권총은 발견되지 않았으며 사건현장이 2시간 만에 돌연 치워지고 현장검증도 하지 않았다. 게다가 간첩을 수사하는 서울지검 공안부가 이 사건을 지휘하는 등 많은 의문점이 제기됐다

 

결국 중앙정보부는 보도통제를 시작, 27일 이후부터는 신문 지면에서 정 여인의 이름이 사라졌다. 사건 발생 5일만에 정종욱의 자백을 받아냈고 4월 20일에 수사를 완전 종결했다. 이후 정종욱은 유일한 증거인 자백을 근그로 1심에서 사형, 항소심에서 무기징역을 받는다.

 

 

 

 

 

이후 1989년 5월 21일 오빠 정종욱은 19년의 형기를 마치고 가석방으로 출옥한 뒤 동생과 관계했던 고위층이 뒤를 봐준다고 했다는 아버지의 회유로 거지자백을 했을 뿐, 집 앞에 있던 괴한들이 동생을 살해했다 "나는 범인이 아니다. 아무리 그래도 내가 내 동생을 죽일 수는 없다. 그리고 내 동생 아들 성일이는 정일권 전 국무총리의 아들이 확실하다. 나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내 누명을 벗을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또한 사건 당시 정부는 김지하 시인이 재벌·국회의원 등 고위층의 부정과 부패를 신랄하게 풍자한 시오적(五賊)’ (1970, 오적은 재벌, 국회의원, 고급공무원, 장성, 장차관)을 발표하면서사회정화닷. 정인숙을 철두철미 본밧아랏…” 이라는 내용을 게재하자 김지하를 구속하고 사상계를 폐간하는 등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그것이 알고 싶다, 정인숙 피살 사건

 

 

당시 수사 경찰은 여전히 범인은 오빠 정종욱이라고 주장한다.....

 

 

 

 

정인숙은 누구인가?

 

옛 이름은 정금지(鄭金枝). 해방되던 해인 1945 2 13일 대구시 남산동 681 2에서 전 대구부시장을 지낸 정도환(鄭道換)(65)의 외동딸로 태어났다아들만 넷을 둔 정씨의 부인은 어떻게든 딸을 보고 싶어 절에 다니며 『딸자식 하나만 낳게 해달라』고 불공을 드렸다는 것. 과연 불공의 효험이 있었던지 45년 정씨의 아내 전씨는 딸 자식을 낳았다. 그것도 인숙양 하나가 아닌 딸 쌍동이었다.

 

바라던 딸을 한꺼번에 둘이나 얻게 되자 「금이야 옥이야」기르며 이름조차 금지(金枝옥지(玉枝)로 지어주었다. 아들 4형제의 막내딸로 태어난 금지·옥지 두 쌍둥이는 온 집안의 귀여움을 독차지 하며 자라났다. 그러나 생후 1년 반 만에 옥지는 죽고 금지만 살아 남게 되었다. 옥지가 죽은 다음해 정씨는 자식을 또 보았으나 이번 역시 아들. 그래서 금지의 외동딸의 위치는 변함이 없었고 그녀를 아끼는 일가의 귀여움을 독차지. 특히 어머니 전씨가 금지를 위하는 것은 딴 가족들보다 더 심했다.

 

이렇게 어려서부터 귀여움을 받으며 자라난 인숙이 자존심 강하고 오만한 성격을 갖게 된 것은 무리가 아니다. 인숙이 대구서 국민학교 다닐 시절 몸종이랄 수 있는 여자아이 하나를 따로 두었다. 학교 갈 때 따라가는가 하면 세수할 때, 밥 먹을 때 등 노상 인숙의 옆에 붙어 잔심부름과 시중을 들게 했다.

 

인숙이 S여중 3학년에 올라갔을 때 4·19가 터졌다. 대구 부시장으로 있던 아버지 정씨가 관직에서 물러나게 되자 가세는 기울기 시작. 이 때부터 집 살림은 어머니 전씨가 계 등으로 꾸려 나갔다.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실직은 인숙에게도 심한 충격을 주었다. 낭비벽 심하고 화려했던 인숙의 생활은 집안 형편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쪼들리기 시작했다. 살고 있던 대구 남산동 집을 팔고 삼덕동으로 이사, 집 규모를 줄여야 하는 등 집안형편이 어려워지면서부터 인숙의 성격도 비뚤어지기 시작했다.

 

콧대 꺾인 방년 19세의 아가씨 인숙은 마지막 남은 재산인 미모를 마음껏 이용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러나 당시로선 요정의 「호스테스」란 생각지도 못했고 『나 정도의 얼굴이면 영화배우가 될 수 있지 않느냐?』하는 것. 그래서 인숙은 등록한 M여대엔 나가지도 않고 서울 충무로 영화가를 기웃거렸다. 이 때 만난 사람이 「시나리오」작가인 장모씨. 당시 장씨는 KBS에 『태양은 늙지 않는다』란 연속극을 집필하고 있었는데 인숙은 친구들을 만나면 자주 『우리 애인은 유명한 작가야』하며 뽐냈다.

 

인숙은 1년 남짓 장씨와 동거생활을 하기도 했다. 장씨와 동거할 때도 인숙은 타고난 사치벽을 버리지 못했다. 이래서 이따금 장씨와 말다툼을 하고 장씨 집을 뛰쳐나온 인숙은 친구들 집을 찾아 하룻밤씩 자고 가기도.

 

장씨와 헤어진 인숙이 다음에 발 디딘 곳이 바로 요정 선운각(仙雲閣). 타고 난 미모와 영어실력이 그녀를 선운각의 1급 호스테스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선운각에서 인숙이 만난 사람이 바로 A. 미남이자 이름이 알려져 있는 A씨라 인숙양의 허영을 채워주기에 충분했다.

 

A씨를 만나면서부터 인숙은 저명 인사들의 노리개 감으로 전락, 밤의 꽃으로서의 진면목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A씨와 인숙의 관계는 석 달 정도 계속되었다는 게 당시 동료들의 이야기다. A씨를 알게 될 때 인숙을 가운데 두고 A씨와 역시 A씨만한 실력자 B씨가 한달 남짓 열띤 각축전을 벌였다는 소문도 있다.

 

 

 

선운각 요정 (1969)

 

그 뒤 인숙은 선운각을 떠나 활동무대를 비밀요정으로 옮겼다. 전부터 아는 K 「마담」이 경영해 오던 한남동 비밀요정을 주무대로 2류급 여배우들을 잘 불러내는 것으로 소문난 S 「마담」집 등에 단골로 불려 다녔다. 그러나 비밀요정 호스테스로 나가는 동안에도 인숙은 콧대가 높아 반드시 마담들에게 그 날 참석자들을 알아보고 웬만한 이름이 아니면 응하지 않았다는 이야기이다.

 

이렇게 밤이면 이름있는 사람들과 접하는 인숙은 낮이면 필동 2가에 자리잡은 집에서 어머니와 단 둘이 지냈다. 어렸을 적부터 인숙 편이었던 어머니는 서울로 올라와도 남편집에서 살지 않고 인숙과 단둘이 살며 딸의 뒷바라지를 해 주었다. 이 당시, 정일권 국무총리가 몇 번 그녀의 집을 방문하는 것이 사람들의 눈에 목격되어 입담으로 전해지게 된다. 정관계 최고의 인사들과 어울리다 서너 번의 임신중절 수술을 받게 된다. 이때 박정희 대통령과도 술자리를 가졌다. 1980대에 국회의원을 지낸 모 인사는 "정인숙을 편력한 이들은 박정희, 박종규, 정일권 씨 등이었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그 밖에 이후락 등과도 관계를 갖기도 했다.

 

필동에서 살 당시인 1968 6월에 인숙은 아들 성일을 낳았다. 그럼 이 아이의 아버지는 누구일까? 시체해부에서도 드러났듯이 인숙은 임신중절 수술을 받은 바 있다. 더욱이 비밀 요정가에선 호스테스가 아이를 낳는 것은 터부로 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숙이 아기를 낳았을 때는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는 얘기다. 그 충분한 이유란 사후보장. 처녀(?)가 호적에도 올리지 못할 아기를 낳을 땐 어딘가 굳게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란 건 틀림없는 일이다.

 

워낙 남자관계가 복잡한 인숙이라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냐 하는 것은 인숙 자신만이 알 일이지만 항간에선 추측만이 난무했다. 68 12 30일자로 발급된 수속서류 없는 회수여권 MA 10647이 발급된 경위만 하더라고 웬만한 실력자가 아니고선 어림도 없는 일이란 것. 그래서 아이의 아버지가 정일권 혹은 박정희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정인숙은 정일권이 자신을 서운하게 할 때마다 자신이 정일권 총리의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을 떠벌리고 다녀 정일권을 난처하게 한다. 이 사실이 야당 인사들과 박정희 대통령의 귀에 들어가게 될까 봐 정일권은 불안해 했고, 서둘러 불법 여권 두 개를 만들어 정인숙을 해외로 내보내고 생활비를 풍족하게 줄 테니 아이를 키우며 해외에서 조용하게 살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어쨌든 아기를 낳은 인숙의 주변은 전보다 눈에 띄게 달라졌다. 우선 본거지인 비밀요정에 잘 나타나지 않았다. 1968 8월엔 시가 7백만 원이 넘는 단층 석조주택을 사서 서교동으로 이사했다. 평소 친하던 K 마담 이외엔 좀 체로 그녀를 만날 수 가 없었다.

 

1969년 봄 일본에 다녀온 인숙은 그 해 5월에 K 마담의 소개로 한남동 조모씨로부터 문제의 코로나를 사들였다. 1969 10 10일 인숙은 아기를 데리고 미국으로 갔다가 한인회장 노진환의 안내를 받으며 석 달 가량 있다가 되돌아 왔다. 그런데 이런 정인숙의 해외생활은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경호실장이었던 박종규가 유력자들에게 연락해서 뒤를 돌봐 준 것으로 알려졌다. 도쿄에서도 박종규와 친한 재인교포 정건영이 정인숙의 후견인 노릇을 했다. 정건영은 도쿄에서 일본명 마치이 히사와라 불리는 유명한 야쿠자 대부로 긴자의 호랑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었다. 그는 도쿄 최대의 조폭조직인 야마구치구미(山口組) 두목 고다마 요시오의 막료이기도 했다. 이들은 우익 폭력집단으로 한국계 프로레슬러 역도산을 살해하는 등 도쿄 암흑가를 지배했다. 그 정건영에게 박종규는 정인숙을 돌보아 주도록 부탁한다.

 

1970121일 다시 돌아온다. 그런데 당시 귀국과 관련하여 박종규가 만류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정인숙의 주변은 의문투성이뿐이었다. 『곧 미국에 갈 테니 차를 팔아야겠다』라고 하는가 하면 『돈 달라는 사람 많아 귀찮아 죽겠다』고 하기도 했고 한때는 『이젠 미국 안 갈래』하기도 했다.

 

사건당일만 해도 자동차매매업소에 나타나 시보레 6기통짜리 흥정을 했다는데 미국에 갈 생각이었다면 한국에서 차를 바꿀 이유가 없다. 이래서 그녀의 주변에서 『미국에 가 있으라』는 「그이」의 요구와 이를 선뜻 응하지 않은 인숙의 태도에 이번 사건의 수수께끼가 숨어 있을 것이라 보기도 했다.

 

어쨌든 3 17일 밤 11 20분 한강변에 울린 3발의 총성으로 한때의 요화(妖花) 정인숙(鄭仁淑) 은 비명에 갔다. 아빠 이름도 모르는 아이 정성일을 홀로 남겨 놓은 채.

 

 

 

비정한 아버지, 정일권

 

정일권(丁一權,1917 11 21 ~ 1994 1 17)만주국의 군인이며, 1940년대 만주국군 장교로 지냈고 2008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친일파이다. 해방 후 대한민국군인이 되었고, 박정희의 군사쿠테타를 도와 외교관정치가가 되었다.

 

러시아 연해주 에서 태어났다. 1940 일본육군사관학교 55기를 졸업하고 만주군 장교로 임관하였다. 광복 후 귀국, 대한민국 육군에 참여하였고, 1949 육군 준장으로 지리산 공비 토벌에 참여하였다. 군 복무 시 5, 8육군참모총장을 지내고 한국전쟁 한국군 주요 지휘관으로 참전했다. 1957 예편 후 이승만에 의해 외교관으로 활동했다. 5.16 군사 정변 발생 후 박정희를 지지하였다.

 

박정희 정권 당시 김형욱이 저돌적 공격성을 보여줬다면 이후락은 일을 꾸미는 재기가 뛰어났고 김성곤은 돈과 조직을 모으는 힘이 있었다. 정일권은 이들과 비교해 딱히 이렇다 할 장점이 있는 건 아니었다. 관운(官運)이 특별한 건 분명했다. 무슨 일을 시키더라도 무난하게 처리하고 요령도 좋았다. 속을 드러내지 않고 겉으로는 기가 막히게 점잖고 온화한 사람처럼 행동했다. 그러다 보니 만나는 사람들한테 인상 좋은 사람으로 비춰졌다. 자리에 대한 집념이 강했지만 대통령 친위부대들의 경계 대상이 될 만큼 욕심을 부리진 않았다. 정일권은대통령 자리를 넘겨다보는 사람은 아니었다. 상대방한테 권력욕이 있다는 느낌을 주지 않았다.

 

1964 총리가 된 뒤 한일협정의 체결을 성사시키는데 노력하였으며, 1966~67년에는 다시 외무부 장관이 되어 총리로 외무장관을 겸직하며 한일협정 직후의 문제를 수습하였다. 국무총리 재직 중 자신의 아이를 낳은 정인숙 살해 사건으로 사회적인 물의를 빚게 되었다.

 

 

 

1968 2 17일 중앙부처, 시·도 연두 순시에 나선 박정희 대통령(왼 쪽)이 정일권 국무총리와 함께 서울역을 둘러보고 있다.

 

김종필의 증언에 따르면 정인숙 사건이 난 뒤 정일권이 박정희 대통령을 찾아가 살려 달라고 호소를 하였고, 박대통령은 일국의 총리가 여자 스캔들 때문에 수사를 받으면 이는 국격의 문제이기에 서울지검 최대현 공안부장에게 지시하여 공안사건으로 처리하게 하였다는 것이었다. 대통령은 이 사건이 있고 9개월 뒤 내각 총사표를 받는 형식으로 정 총리를 교체했다. 세월을 흘려 보내고 모양과 명분을 갖춰 그를 경질한 것이니 이는 국가의 품격을 고려한 박 대통령의 인사 방식이었다.

 

 

 

1974 10월 서울 태평로 국회의사당(지금의 서울시 의회)의 정일권 국회의장 방에 들른 김종필 국무총리(왼쪽)가 정 의장에게 담배를 권하고 있다. 김 총리는 이날 국회 본회의 대정부질문에 답변하기 위해 국회에 나왔다.

 

이후 1970년 공화당 총재 상임 고문을 지냈으며, 총리직에서 물러난 이듬해인 1971년 총선에서 전국구 의원을, 1973년 유신국회에서 지역구(속초-인제-고성-양양) 의원으로 선출돼 6년간 국회의장을 지냈다. 박 대통령은 자신과 동갑이자 만주군관학교와 일본육사의 동창(정씨가 각각 5, 2년 선배)인 정일권을 끝까지 챙겨준 셈이다.

1980 정계에서 은퇴했다. 그 뒤 국정자문위원을 거쳐 1989년 한국자유총연맹 총재에 취임하였다.

 

 

 

정인숙과 정일권의 아들, 정성일

 

1968년에 태어나 1970년에 어머니를 여의고 정일권은 유년 시절을 자신의 출생 비밀을 모른 채 외할머니 손에 자랐다. 외할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친척에 맡겨졌고, 막내 외삼촌 집에서 청소년기를 보낸 그는 고등학교 2학년 때인 1985년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그가 어머니인 정인숙씨의 사건을 처음 접한 것은 미국 유학시절 한국에서 발행한 모 잡지를 통해서였다고 한다

 

정 씨는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U.S.C대학 경영학과를 졸업한 뒤 LA에 소재한 금융회사에서 근무하기도 했다. 대학생 때인 1991 2월 정 씨는 한국에 돌아왔다. 그는 귀국 후 만난 넷째 외삼촌 정종욱 씨를 통해 자신의 아버지가 정일권 전 총리였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고 한다.

 

출생의 비밀을 풀 수 있게 된 정 씨는 1991 6월 정 전 총리를 상대로 친자확인소송을 제기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셋째 외숙모와 막내 외삼촌 등 다른 친척들의 강경한 만류로 끝내 한 달 만에 소송을 취하했다. 이때 정일권 전 총리가 상당액(100만 달러)의 합의금을 취하 조건으로 건네줬다는 소문이 돌았다.

 

 

 

1991 2 28, 3공화국 당시 한강변에서 의문의 피살체로 발견된 정인숙(당시 26)의 혈육인 정성일(21, LA거주)씨가 정일권씨가 아버지라는 친자확인 소송을 내기 위해 김포공항에 귀국하고 있다.

 

정 씨는 이후 LA로 다시 돌아갔고, 일본을 자주 드나들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어머니가 사망하기 전까지 주로 일본에서 지냈고, 외삼촌들이 일본에서 사업을 하는 등 외가 친척들이 일본에 거주했기 때문이다.

 

정 씨는 1993년 다시 귀국해 정 전 총리를 상대로 친자확인소송을 재시도했으나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정 전 총리는 1994년 별세했다. 한편 정성일은 1993 SBS <주병진쇼>에 출연해 "최근 정일권씨가 나와의 직접 통화에서 '당신은 나의 아들이 아니며 내가 모시던 분의 아들'이라고 밝혔다"고 주장했다. '만인지상 일인지하'라는 국무총리가 모시던 분이라면 말 그대로 대통령 밖에 없다. 정성일은 자신이 박정희의 아들일 수 있다는 여지를 남겨놓은 것이다. 그러나 친자확인 소송을 냈다가 취하한 그의 행태로 미루어 주장에 신빙성을 판단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 문제다.

 

1998년 박근혜 당시 의원은 여성지와의 인터뷰에서 박정희가 정인숙이 낳은 정성일의 아버지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때 정 여인(정인숙)과 관련된 당사자를 알고 있었다. 물론 상당한 고위층이었다. 그 사람은 사표를 가지고 아버지에게 찾아와서 '제가 관계했던 여자지만 결코 죽이지는 않았다'고 울면서 사죄했다. 아버지는 그때 그 당사자를 문책하게 되면 그가 살인자로 비쳐질 것을 우려했기 때문에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은 것 같다."

 

이후 정 씨는 LA에서 사업을 하며 강 아무개 씨와 결혼해서 딸과 아들을 낳고 평범한 가정을 꾸리며 살아왔다. 다만 가정생활이 원만하지 못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2005년 말 다시 귀국한 정 씨는 M&A 전문가로 활동해 왔고, 2006 6월에는 강남에 ‘서든일렉트릭’이란 회사를 설립하고 압구정동 아파트에서 외제승용차를 타고 다니는 등 제법 호사스런 생활을 해 왔다이와 관련하여서도 미국 LA에 거주하다 2001년 신용카드 도용의 혐의로 기소돼 실형을 살고 2005년 말 강제 추방돼 귀국하게 되었으며, M&A 전문가로 활동 또한 실적이 없는 허구라는 주장이 있다. 이때까지만 해도 대다수 사람들은 정 씨가 ‘정인숙 아들’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2007 2월 한성골프장 사장 납치사건이 터지면서 정 씨의 존재는 만천하에 드러나게 됐고, 그의 인생 또한 막장으로 치달았다. 특히 정 씨는 청송교도소에서 수감생활을 하면서 ‘암’을 키웠고, 결국 직장암 말기에 폐와 간까지 전이돼 2012년 현재 힘겨운 투병생활을 하면서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었다.

 

한성골프장 사건은 외삼촌인 윤 씨와 조카인 강 사장이 골프장 이권을 놓고 감정의 골이 깊어지면서 시작됐다. 윤 씨는 1984년 한성골프장 조성 초기부터 당시 회장이었던 강 사장의 아버지를 도와 골프장 사업이 본 궤도에 오르는 데 큰 공을 세운 것으로 알려졌다. 윤 씨는 2000 7월 골프장 상무에서 전무로 승진, 당시 사장이었던 강 사장의 동생과 호흡을 맞추며 골프장 운영에 참여했으나 2002년 강 사장이 사장으로 취임하자 골프장 운영에서 손을 뗐고, 이때부터 강 사장과 윤 씨의 관계가 악화일로로 치달았다.

 

2007 2 26일 오후 7 43분 인천공항 1 3번 출입문 앞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던 강 사장 등 3명이 흰색 카니발 승합차에 납치돼 강원도 인근 펜션에 감금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납치 이틀 만에 탈출한 강 사장은 유력한 용의자로 윤 씨를 지목했다. 이에 따라 경찰은 윤 씨의 통신내역 조회와 주변 탐문수사 등을 통해 윤 씨가 납치를 사주했다는 결정적 증거를 확보하고 그를 검거했다.

 

 

 

 

당시 경찰조사를 통해 윤 씨(당시 66)와 김 변호사(검사 출신, 당시 41) 그리고 정일권 등 3명이 사전에 치밀한 공모를 벌여 경비업체를 동원해 강 사장 일행을 납치해 골프장 소유권 포기각서를 받아 골프장을 통째로 빼앗으려 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이들은 2007 12월 항소심에서 김 변호사는 징역 4(상고 포기), 나머지 둘은 2008 5월 대법원에서 윤 씨는 징역 2, 정성일은 징역 3년이 확정되었다.

 

사실 이 사건은 대법원 확정 판결 이후에도 숱한 의문과 억측이 나돌았다. 다만 핵심 공모자로 지목된 세 사람이 모두 ‘영어의 몸’이 되면서 한동안 잊힌 사건이 된 것이다. 사건 발생 이후 수사기관의 조사나 재판 과정에서 윤 씨는 한결같이 자신의 무죄를 주장했지만 또 다른 공모자로 지목된 김 변호사와 정 씨가 납치극을 시인하면서 세 사람 모두 실형을 선고 받고 수감생활을 했다.

 

그러나 출소 후, 윤 씨와 정성일은 당시 납치극이 자작극이라고 주장했다. 정성일은 “당시 납치극은 강 사장과 김 변호사가 치밀하게 준비한 자작극으로 그 덫에 저와 윤 회장이 걸려든 사건”이라며 “사건 배후에는 김 변호사를 지원한 검찰 거물급이 직간접적으로 연루돼 있는 등 엄청난 검은 음모가 도사리고 있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