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3월/3월 20일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 개최

산풀내음 2017. 1. 15. 19:20

1946 3 20,

1차 미소공동위원회 개최

 

미국과 소련의 냉전으로 해방 후 곧 삼팔선을 기준으로 남측은 미군이 북측은 소련군이 주둔하게 되었다, 그리고 1945 12 16일 미국, 소련, 영국은 모스크바에서 전후 문제를 처리하기 위한 외무장관회의를 개최하였다.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12 27 4개항의 합의문을 발표하였다.

1) 민주주의 원칙에 의해 임시정부를 건설한다.

2) 임시정부 수립을 돕기 위해 미소공동위원회를 설치한다.

3) 미국과 소련, 영국, 중국은 임시정부 수립을 돕기 위해 최대 5년간의 신탁통치를 실시한다.

4) 2주일 이내에 미·소 사령부의 대표회의를 개최한다.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과는 곧 대한민국으로 전파되었고 이는 좌우익 모두의 반탁운동으로 연결되었다. 그러나 좌익은 1946 1월부터 당초의 주장을 뒤집고 모스크바 3상회의 결과를 수용하여 신탁통치를 찬성하게 되었다.

 

이후 1946 1 16일 서울 덕수궁에서 개최된 미소공동위원회의 예비회담을 거쳐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1946 3 20일 서울 덕수궁 석조전에서 개최됐다. 미국측은 아놀드 소장이, 소련측은 스티코프 중장이 대표를 맡았다.

 

 

회의에서 소련은 미국이 이미 예상한 대로 모스크바결정을 지지하지 않는 반탁세력은 임시정부 구성에서 제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난항을 거듭하던 미, 소공위는 소련측이 양보하여 반탁투쟁을 했더라도 이후에 그러한 활동을 하지 않겠다고 서약하면 임시정부에 참가할 수 있다는 방안을 제시했고 이것에 토대를 두어 공동성명 5호가 발표되었다.

 

1946 5월 미소공위가 열린 덕수궁 앞에서 개최된 신탁통치 반대 집회

 

그러나 이 선언서에 서명을 하는 것이 신탁통치를 받아들이겠다는 것을 뜻하는 것인지 여부를 놓고 미소간에 논란이 벌어져 끝을 맺지 못하자 난항 끝에 결국 5 6일 무기휴회를 선언했다.

 

휴회 후 1년이 지난 19475 21일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렸다. 하지만 제2차 미소공동위도 미국과 소련의 입장차이로 교착상태에 빠지게 된다. 결국 소련대표단이 서울 철수를 발표하고 1947 10 21일 평양을 떠남으로써 2년여에 걸쳐 진행된 미소공동위원회는 성과 없이 막을 내리고 만다.

 

2차 미소공동위원회

2차 미소공동위원회를 마치고 기념 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