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3월/3월 20일

미국, 이라크 개전(開戰)

산풀내음 2017. 1. 15. 19:36

2003 3 20,

미국, 이라크 개전(開戰)

 

이라크 전쟁 또는 제2차 걸프 전쟁 또는 이라크 자유 작전(Operation lraqi Freedom)2003 3월 20 미군의 이라크 침공으로 시작되어, 2011 12월 15 종전되었다. 그리고 미군이 이라크에서 철수하자마자 이라크는 내란에 휩싸였다.

 

2003 3 17일 미국 대통령 조지 W. 부시가 대국민 담화를 발표하고 '사담 후세인 이라크 대통령에게 48시간 내에 이라크를 떠나지 않으면 군사공격을 단행하겠다' '최후통첩'을 보냈다. "미국은 지난 1991년 걸프전 당시 유엔 안전보장 이사회가 채택한 결의를 근거로 자국 안보를 확고히 하기 위해 주권국가로서 무력사용 권한을 갖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어서 "미국과 기타 국가들이 수집한 정보들에 따르면 이라크 정권은 치명적인 살상무기들을 지속적으로 보유해 왔으며 이들을 은폐하고 있다" "유엔 사찰단과 언론인을 포함해 이라크 내 머물고 있는 모든 외국인은 안전을 위해 이라크를 즉각 떠나야 한다"고 밝혔다.

 

"연합군은 이라크 정권 접수 작업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이라크 국민에게 필요한 식량과 의약품을 제공할 것"이라며 "연합군은 테러 조직을 해체하고 이라크국민들이 번영과 자유로운 새 정부를 구성할 수 있도록 도울 것"이라고 말했다.

 

2003 3 17, 부시 대통령 대국민 담화 발표

 

부시의 최후통첩에 맞추어 미국 국토안보부는 미국 내 테러 위협 수준을코드 옐로(code yellow)’에서코드 오렌지(code orange)’로 한 단계 높이고, 미국 내 전역에서 테러 비상체제에 돌입했다. 한편 이라크 지도부는 다음 날인 18일 부시 대통령의 최후통첩을 공식 거부했다고 이라크 국영 알 샤바브방송이 보도했다.

 

2003 3 20,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최후통첩 시한을 2시간15분 넘긴 19일 오후 1015(이라크시각 20일 오전 615, 한국시각 20일 낮 1215) TV로 생중계된 연설에서이라크를 무장해제하고 그 국민을 해방시키기 위한 전쟁 개시 명령을 내렸다고 밝혔다. 미국은 이번 작전명을이라크 자유 작전(Operation Iraqi Freedom)’으로 명명했다. 부시 대통령은첫 번째 공격은 선별적인 군사 목표물에 대한 공격이라고 밝혔다.

 




 

반전·평화 목소리가 전세계 주요 도시에서 들끓는 가운데 미국 내반전 운동의 요람샌프란시스코와 로스앤젤레스에서는 20일 하루 동안 이라크 전쟁에 반대하는 항의 시위가 벌어져 일부 지역의 교통이 두절되는 등 홍역을 치렀다. 샌프란시스코 시위에서는 1300여명이 경찰에 체포됐고 LA 역시 40여명이 경찰과 관계 당국에 연행됐다.

 


 

후세인 대통령은 미국의 공격이 시작된 지 3시간쯤 뒤인 이날 오전 830(한국시각 오후 230) TV로 중계된 대국민 연설을 통해대미 항전을 촉구하고승리를 다짐했다. 하지만 이것과 관련해녹화 테이프라는 의견도 분분했다.

 

징병제로 100여 만 명이 넘는 이라크군은 수적 우세임에도 불구하고 미군에게 일방적으로 패배했고, , 영 연합군의 공격을 받은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가 전쟁 시작 21일째인 49(현지 시각) 사실상 함락되었다.

 

이라크전쟁을 반대해온 대부분의 아랍 국가들은 바그다드가 미군에 함락되자 망연자실한 표정이다. 후세인 정권의 핍박을 피해 미국으로 이민간 이라크인들과 이스라엘은 환영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COSTS OF WAR: Flag-draped coffins of American soldiers killed in action in Iraq

 

그리고 2003 12 13일 사담 후세인 전 이라크 대통령이 자신의 고향인 티크리트 인근 지하에 땅굴을 파고 숨어 있다가 미군에 체포됐다. 이는 같은 해 4월 후세인이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에서 종적을 감춘 뒤 약 8개월 만의 일이었다.

 

그리고 2004 7 1일 그의 죄에 대한 첫 재판이 열렸다. 사담 후세인 전 이라크 대통령의 첫 재판을 TV를 통해 지켜본 이라크인들은 분노와 동정 등이 뒤섞인 반응을 보였다.

 

후세인이 1988 5000명의 쿠르드족을 학살한 북부 할라브자의 주민들은 한목소리로복수를 부르짖었다. 키르쿠크 출신인 한 쿠르드족은 후세인이 젊은 판사 앞에 서 있는 광경을아름다운 정의라고 표현했다. 후세인의 사촌 알리가 지시한 공격으로 자녀 6명을 잃었다는 사람은희생자들 앞에서 재판하라고 주장했다.

 

후세인의 지지세력인 수니파 국민들은후세인은 이라크를 해치려는 사람들만 공격했다고 항변하며 동정했다. 그의 고향인 티크리트의 한 식당 종업원은 TV를 보고 눈시울을 붉히며후세인이 저런 꼴을 당하는 걸 보느니 죽는 게 나았다고 말했다. 수니파가 다수 거주하는 라마디 주민도최소한 후세인 시절엔 안전했다사담 시절이 더 살기 좋았다고 비판했다.

 

2006 11 5 1심 재판에서 시아파 무슬림 학살에 대한 유죄가 인정되어 사형 (교수형)을 선고 받았으며, 사담은 "나는 사형당하는 것이 절대 두렵지 않다. 이란과 손잡으면 안되며, 경계해야 한다." 고 말하였다. 이후 항소했으나 이라크 최고 항소법원은 사형을 확정하여 2006 12 30일 수도 바그다드에서 사형이 집행되었다.

 

그의 시신은 31일 고향인 이라크 북부 티크리트 부근에 매장됐다. 그의 사형은 이라크 형법이 사형을 금지한 만 70세를 4개월 앞두고 집행됐고, 처형 장면을 담은 동영상은 인터넷에 유포되기도 했다.

 

한편 처형에 대한 저항도 대단했다. 교수형에 처해진 뒤 이라크 전역에서 90여명이 숨지는 무차별 테러가 잇따랐다. 특히 바그다드 북서부 시아파와 수니파가 혼재하는 후리야 지역에서는 3건의 연쇄 차량폭탄테러가 발생해 37명이 숨지고 76명이 다쳤다. 바그다드 남쪽 160㎞의 이슬람 시아파 거주지역 쿠파에서도 미니버스에서 폭탄이 터지면서 31명이 사망했다.

 

미군은 후세인 독재세력의 지지기반을 와해시킴으로써 그 동안 유지되던 이라크 내 치안도 함께 와해되었으며 이로 인해 보복살해 등 종파분쟁이 발생하고 치안부재로 인한 무장세력의 형성과 이들의 저항으로 미군 수천 명이 전사하는 결과를 낳았다.

 

뒤늦게 부족한 지상군을 증원하고 이라크 경찰과 군을 재건하여 미군 전사자 수가 크게 줄고 안정을 되찾아 갔으나 미군이 철수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고 7년이 지난 2010 8월 20. 모든 전투병력을 철수시키기 시작, 2011 12월 15 미국에서 공식으로 종전을 선언하였으며 같은해 12월 18 미군은 이라크에서 철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