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4월/4월 1일

유관순, 아우내 장터 만세운동에 참가했다 투옥

산풀내음 2017. 1. 28. 2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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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관순, 아우내 장터 만세운동에 참가했다 투옥

 

 

가족을 따라 지령리교회를 다니던 유관순이 13세 때 서울 이화학당의 보통과 2학년에 편입한 것은 여성 선교사인 샤프 앨리스(한국명 사애리시·史愛理施)의 추천에 의해서였다. 충청도 지역에서 선교와 교육 사업에 열성을 바치던 사애리시 부인은 총명했던 유관순과 사촌언니 유예도를 이화학당에 보냈다. 3년 만에 보통과를 졸업한 유관순은 1918 4월 고등과에 진학하였고, 학교 옆 정동제일교회를 다니면서 민족의식을 키워갔다.

 

중학교 시절 유관순 열사, 유관순 열사는 “난 잔다르크처럼 나라를 구하는 소녀가 될 테다. 누구나 노력하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나이팅게일처럼 천사와 같은 마음씨도 가져야지.” 라고 매일같이 기도했다고 한다.

당시 이화학당 전경

 

3·1운동이 일어나자 이화학당의 선배들은 1학년생을 배제했지만 유관순은 담장을 넘어서 시위 대열에 참여했다. 유관순은 친구들에게공부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고향에 내려가 독립운동을 벌이자고 제안했고, 헤어지면서독립된 뒤에 만나자고 다짐했다. ‘칙칙폭폭하는 기차소리도대한독립으로 들린다고 말할 정도로 독립 열망을 품었던 유관순은 고향에 돌아와 천안 일대의 만세 시위 준비에 연락 임무를 맡았다.

 

천안 아우내장터 만세운동은 홍일선이 만세운동을 발의하였으며 김교선이 주도하여 만세시위를 준비하였다. 3 29한동규이순구에게 그 취지를 설명하고 동의를 얻었으며 한동규는 이백하에게 함께 참여하도록 권유하여 찬동을 얻었다.

 

또한 서울에서 만세운동을 목격한 유관순 3 13일 귀향하여 유중권(아버지)조인원 그리고 유중무(숙부)에게 서울의 상황을 전하자 이들은 4 1일 병천 시장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하였다. 3 31일 밤 자정에 병천 시장을 중심으로 천안 길목과 수신면 산마루 및 진천 고개마루에 거사를 알리는 봉화횃불을 올렸다. 야간을 이용해 예배당에서 태극기를 제작하였고, 천안쪽 길목은 조병호가, 수신면 쪽은 조만형, 충북 진천 쪽은 박봉래가 맡아 만세를 권유하기로 하였다.

 

4 1일 오후 1시경 조인원은 시장의 군중 앞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이에 시장 군중들이 크게 외쳤다. 시장에서 약 50보 정도 떨어진 병천 헌병주재소의 소산 소장 등 일경 5명은 만세 소리에 놀라 시장으로 출동하여 해산을 요구하였으나 시위대가 불응하자 즉시 발포하였다.

 

사상자들의 친지는 시신을 헌병 주재소를 옮기고 항의를 하였고 김교선, 한동규, 이백하, 이순구 등이 군중 100명과 함께 주재소로 가서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를 불렀으며 사망자에 대한 조치와 구금자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유중권은 헌병에게 총검으로 옆구리와 머리를 찔려 빈사 상태에 이르렀는데 동생 유중무는 형을 업고 주재소로 가서 치료를 요구하였다. 군중이 점차 늘어나서 1500명이 이르렀을 때 헌병들이 권총을 발포하였다. 시위대는 헌병 보조원 맹성호와 정수영에게 동족으로 같은 민족을 죽이느냐고 항의를 하였고, 유관순은 주재소장을 잡아 낚아채면서 항의를 하였다.

 

1919 4 1일 아우내 장터의 만세 시위 때 유관순은 일본군의 무차별 발포로 부모님을 현장에서 잃고 본인과 오빠, 작은 아버지가 투옥되었다. 공주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7년 형을 선고 받은 열사는 이에 불복하여 경성복심법원에 공소하였으니 7년 형이 확정되어 서대문형무소에 감금되었다.


이듬해 3·1운동 1주년 기념 옥중 시위까지 주도했던 그였지만, 1920 9 28일 고문 후유증으로 방광이 파열되고 이를 일제가 방치하는 바람에 18세의 꽃다운 나이로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열사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유관순 열사가 서대문 형무소에 있을 당시의 기록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