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9년 4월 6일,
로버트 피어리 북극 탐험 성공
1909년 4월 6일 로버트 피어리(Robert Edwin Peary, 1856∼1920)가 인류 최초로 북극점 위에 자신의 발자국을 새겼다. 피어리와 생사고락을 함께한 흑인 대원 매슈 헨슨과 에스키모인 4명이 감격의 순간을 함께 했다. 북극은 남극과는 달리 육지로 이뤄져 있지 않다. 유빙(流氷)과 깨진 얼음 사이로 스며드는 바닷물은 탐험가들에게 북극을 가까이 할 수 없는 ‘영원한 미지의 세계’로 남겨두었다. 피어리 이전에 756명이 그곳을 정복하려다 목숨을 잃었다. 피어리 역시 일곱 번째 도전 만에 북극점 도달에 성공했다. 북극점에 성조기를 꽂았을 때 그는 예전의 동상으로 이미 발가락 8개를 잃은 상태였다.
After several failed attempts, 23 years of effort, and a lifetime of obsession with the Arctic, Admiral Robert Peary led in April 1909 what was then believed to be the first successful expedition to the North Pole. His stalwart crew, pictured here, included Inuits Ooqeah, Ootah, Egingwah, and Seeglo and fellow American Matthew Henson. Later studies found that Peary was actually 30 to 60 miles (50 to 100 kilometers) short of the Pole.
American polar explorer Robert E. Peary stands with husky sled dogs.
1902년에 발가락 여덟개를 동상으로 잃으면서 북위 84도 17분 지점까지 갔지만 발길을 돌려야 했던 피어리는 두 개의 발가락만으로 마침내 북극점에 도달해 20세기 탐험사에 첫 페이지를 장식했다. 성조기를 꺼내 기념사진을 찍은 피어리는 성조기의 가장자리를 찢어 “1909년 4월 6일 북위 90도에 닿았다. 피어리”라고 쓴 종이와 함께 얼음 속에 묻었다. 1908년 7월 6일 ‘루스벨트호’를 이끌고 뉴욕항을 떠난 지 9개월 만이었다.
하지만 10월 1일 뉴욕에 돌아온 피어리는 프레데릭 쿡과 ‘북극 최초 발견자 논쟁’에 휘말리게 됐다. 논쟁은 9월에 피어리와 쿡이 불과 닷새 차이로 각각 자신이 최초로 북극 탐험에 성공했다고 본국에 타전하면서 촉발됐다. 쿡은 피어리보다 1년 앞선 1908년 4월 21일 북극점에 도달했다고 주장했다. ‘뉴욕 헤럴드’는 쿡을 지지하고 ‘내셔널 지오그래픽 소사이어티’와 ‘뉴욕타임스’는 피어리를 지지하는 등 논쟁은 미국 탐험계와 지식인 사이에 뜨겁게 불붙었다. 그러나 논쟁 중에 쿡의 거짓임이 들어나 역사는 여전히 피어리를 최초의 북극점 정복자로 기록하고 있는 듯 했다.
그렇다고 문제가 깔끔히 정리된 것은 아니었다. 쿡과의 싸움이 끝나자 이번에는 피어리의 북극점 도달 진위에 대한 논쟁이 불붙었다. 회의론자들은 당시 피어리가 정확한 위치측정 기구를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그의 북극점 도달 속도가 너무 빠르다는 점을 지적했다. 미국지리학회(NGS)는 피어리의 탐사일지에 적힌 바다와 기상 관측 기록을 조사한 결과 북극점에서 40km 못 미친 지점까지만 도달한 것으로 밝혀졌다. 하지만 그가 정확하게 북위 90도는 아니지만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북쪽 지점인 89도 57분’까지 나아갔다.
또 한편 89도 57분도 매튜 핸슨(Matthew Henson, 1866~1955)이 먼저 도달했다. 그는 흑인으로 어릴 적부터 마차 및 개썰매 조종에 뛰어났고 이뉴이트어도 잘하고 사냥도 잘한 인물이었다. 피어리의 조수로서 활약하며 당시 1시간이나 먼저 북극점에 도달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질투한 피어리가 숨기고 자신이 먼저 갔다고 사실을 조작했던 거였다.
매튜 핸슨(Matthew Henson)
피어리는 그 동안 베일에 가려졌던 북극 에스키모 문화를 서구에 소개하는 데에 중요한 공헌(?)을 했다. 그가 저술한 에스키모 관련 저서들은 인류학적으로 커다란 의미를 가진다. 그러나 피어리에게 에스키모는 민속학적 연구대상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 역시 근대 인류학의 인종주의적 편견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생물 표본용’으로 6명의 에스키모를 뉴욕에 데리고 돌아왔다. 에스키모들은 박물관에서 ‘인간 전시품’ 노릇을 하다가 죽어갔다.
Robert Edwin Peary Distributing Gifts to Eskimos
당시 피어리의 손에 이끌려 온 에스키모 중의 한 명은 ‘자연 정복’이라는 인류의 개가 뒤에 숨은 문명의 오만함에 대해 이렇게 절규했다.
“당신들이 슬퍼진다는 게 뭔지 알아? (삶을 잃어버린) 우리를 향해 손가락질하는 구경꾼을 볼 때 느끼는 외로움과 공포를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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